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3. '여기 사람' 답지 않은 헤르미온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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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3. '여기 사람' 답지 않은 헤르미온느

유의미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해리 포터에서 헤르미온느를 제일 좋아해요. 헤르미온느는 태생이 머글이라 순혈 마법사 론이랑 정반대에요. 해리 포터도 혼혈이지만, 해리는 마법 세계에 처음 와도 다들 자기를 알아봐 주고 그러잖아요. 교장이랑도 친하고, 숲 지킴이 해그리드랑도 친하고. 헤르미온느는 그런 믿을 구석이 없어요. 저랑은 그 점이 비슷해요. 아, 물론 헤르미온느는 모범생이고 저는 아니지만.

이대 앞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홍차 카페에서 헤르미온느를 만났다. 짧은 머리와 늘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 입가가 인상적이었다. 홍차 종류가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젓다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와서는 디저트까지 단숨에 결정했다. 인터뷰 설명을 듣자마자 재미있겠다며 눈을 빛냈다. 내가 펜을 찾지 못해 당황하자 들고 있던 백팩에서 펜을 몇 개 꺼내더니 편한 대로 쓰라며 건넸다. 종이도 주겠다며 말릴 새도 없이 노트를 찢었다.

일러스트 이민

Q.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고요. 지금은 좀 마이너한 전공 공부를 하고 있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카페 같은 데서 글 같은 걸 씁니다. 요즘 관심 주제는 ‘아웃 사이더’에요. 사람의 서사, 인생사, 소속감 같은 주제에 유독 관심이 가요. 규칙적으로 공부하면 누구든 대작을 쓸 수 있대요. 저는 공부하는 건 재밌는데, 매일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그 루틴이 될 듯 말 듯 잘 안 잡혀서 요새는 제가 공부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걸까 싶어요.

Q. 어제는 뭐 하셨나요?

청강하는 학교 수업을 들으러 갔어요. 몇 주차인지 헷갈려서 텍스트를 잘못 읽어갔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어요. 토론이 재미있었는데, 내가 올바르게 말하고 있는지 좀 걱정하다가 ‘뭐 그렇지만 이렇게 실패하며 배우는 거지.’ 생각했고. 집에 가서는 고양이랑 데이트하고, 해리포터 7권을 읽었어요. 영어공부 핑계로 영어로 읽고 있어요. 한글로 읽을 때는 몰랐는데 영어는 천천히 읽게 되니까 하나하나 곱씹게 돼요.

Q. SNS 많이 하시나요?

트위터 계정 두 개, 블로그 하나, 인스타그램도 두 개 있어요. 인스타는 올릴 만한 일상이 생겼을 때 쓰는 거 하나랑 고양이 계정이 있어요. 트위터는 일기장보다도 더 일기장 같은, 일기장에도 잘 안 쓰는 내용을 써요. 아, 그러고 보니 트위터는 팬 활동 계정도 두 개 더 있어서 네 개였네요. 그 계정에서 어느 날 갑자기 '랟펨'(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줄임말) 150명으로부터 차단을 당했어요. 

저랑 같은 팬클럽 중에도 랟펨 집단이 있어요. 여자 아이돌의 자극적인 컨셉이 남성 관객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점을 비판해요. 주체적으로 하는 신체 노출일지라도 남성에 의해 성적 대상화 되니까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라는 거죠. 일부 동의하지만, 그걸 조롱과 비난의 방식으로 지적해서 성희롱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저는 그들을 가수로서도 좋아하지만, 그냥 눈여겨보고 일상을 응원하는 사람이에요.  가끔은 정말 가슴 아프도록 행복을 바랄 때가 있어요. 사랑은 상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인 것 같아요.

Q. 십만 원이 있다면 사고 싶은 것이 있나요?

십만 원밖에 없어요? 애플펜슬이 사고 싶은데. 아이패드로 논문 읽을 때 낙서하면서 볼 수 있고, 필기할 때 선도 안 비뚤어고 깔끔하게 돼요. 원래 있었는데 제주도 여행 갔다가 공항에서 잃어버렸어요. 만약 이걸 안 잃어버렸다면 안경 렌즈를 사고 싶어요. 너무 흠집이 많이 나서. 유니클로에서 기본 셔츠도 색깔 별로 사고 싶고. 십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네요, 하하. 아, 고양이 정수기는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수기가 있으면 물을 더 잘 먹지 않을까요? 집사는 고양이가 물을 먹는 걸 봐도 더 먹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들어요.

일러스트 이민

Q. ‘~답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저는 그 생각을 언제나 해요! 뭔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과 끝없는 열등감으로부터 최근에야 조금 벗어났어요. 어릴 때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멋있어 보이고 엘리트 같잖아요. 특목고 학생이나 서울대생을 동경했어요. 지방대에 다닐 땐 ‘서울 내 4년제 대학생’이 되고 싶었어요. 이중 전공 때는 사회대생처럼 보이고 싶었고, 제가 예술 전공인 게 티가 난다고 생각했어요. 아는 거 많고, 똑똑해 보이는 ‘진짜 사회대생’들 틈에서 내가 충분히 말을 잘하고 있는지 걱정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자퇴해서 고등학교 사회 공부를 별로 안 했는데, 괜히 그것 때문에 나만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대학원생 때는 서울에서 학교 나오고 학부 때부터 전공 공부도 잘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처음 이 질문을 받고 제가 대학원생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또 제 생활패턴은 너무 대학원생이에요. 카페에서 공부하고, 세미나 하고, 쪽글 마감에 시달리고. 대학원에 가면 마침내 이 캠퍼스의 주인인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어요. 이젠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역시 가지고 나면 별거 아니었네요.

Q. 미래에 뭐 하고 있을 거 같아요?

한량처럼 별거 안 하고 흘러가는 대로 지낼 것 같아요. 글이 아니더라도 뭐라도 만들 것 같고요. 예술을 전공할 때도 다큐멘터리 같은 내 작품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때는 카메라가 무서웠어요. 노골적으로 제 시각에서 편집이 들어가니까, 그 작품에서는 내가 신이라도 된 것처럼 다 할 수 있잖아요. 글보다 훨씬 더 위험한 매체라고 느꼈고, 제가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어요. 공부를 더 하기 전엔 카메라를 잡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사는 건 어떻나요?

저는 서울 청년이 아닌 것 같아요. 최근에 수도권으로 이사 온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고요. 얼마 전까지 서울에 살던 그때는 제 인생에서 가장 복 받은 시기였어요. 집안 형편이 잘 풀려서 다행히 보증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어요. 원하던 학교도 들어가고, 드디어 강원도를 벗어난 즐거움에 취해있었죠. 여기 애들이 세미나나 집회를 하는 걸 보면서 ‘아! 이게 바로 청년이지.’ 했어요. 세상에 이런 세계가 있다니! 청년 잡지도 많고 재미있는 모임도 많아 보이고. 이걸 조금 더 일찍 경험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고 너무 아쉬워서, 더 빨리 왔어야 했다는 속상함도 있었어요.

돈 관리를 못해서 밥을 제때 못 먹고 공과금도 못 내서 힘들기도 했지만요. 제발 통장 잔액이 십만 원만 넘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라면만 먹고 사는 건 아니었고, 이만 원 내고 술 먹으면서 공과금은 못 내고 그랬어요. 그래도 청년이라서 고달프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드디어 이런 걸 누리고 있네.’ 했죠. 이전에는 청년들이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못 했고, 힙하고 대안적인 문화나 페미니즘 이야기를 전부 여기 와서 접했어요. 가부장적 문화에 이미 적응돼서 저도 모르게 실수할까 걱정도 많이 했어요. 나 빼고 이런 문화를 원래부터 알던 사람들 같잖아요. 공과금 밀리면 힘들지만, 생각보다 전기가 당장 끊기지는 않아요. 끊겨도 카페 가면 되죠. 저는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기쁘고, 학교를 졸업하면 이게 끝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만 조금 있었어요.

저는 여기 사람들이랑 완전 동일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근본적으로 ‘빻은’ 사람이에요. 소외감과 소속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해요.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에 살았던 사람을 부러워하고, 애초에 서울로 대학을 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Q. 그럼 지금은 서울 생활이 끝난 건가요?

왔다갔다 해요.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외국에 갈 수도 있고, 엄마가 쫓아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서울에 살 때는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는데, 지금은 더 일과가 안정적이에요. 가끔 수업 청강하러 나오고, 스터디 카페 가서 공부도 하지만 대부분 집에 있어요. 트위터하고, 고양이랑 놀고, 인스타 조금 하고, 쪽글 쓰고, 다이어리 정리하고, 해리포터 읽고, 논문 읽고. 이십 대 초반에는 ‘잠은 같은 장소에서 자라.’ 하는 엄마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매일 다른 장소에서 잔 것 같아요. 지금은 몇 살 더 먹고 나니 외박 횟수도 줄어들고, 놀더라도 집에는 들어가요. 

이제 드라마틱한 일이 별로 없어요. 누구랑 싸우는 일도 별로 없고, 성격이 안 맞아도 적당히 피해가고 격렬히 싸우지 않아요. 술도 그렇게 안 마시고. 아, 얼마 전에 술 마시고 팔을 다쳐서 깁스했지만… 그래도 일 년 만의 외박이었어요. 예전이 더 청년다웠던 것 같은데, 안정적인 게 있으면 청년이 아닌 걸까 싶기도 하네요. 집을 안정적으로 소유하면 저는 이미 청년이 아닐 것 같긴 해요. 집이 아주 중요해요. 한 군데서 계속 잘 수 있으면, 다른 게 다 변해도 어쨌든 이 집에서는 계속 잘 수 있다는 거잖아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다시 생각해 보니 서울 살 때 행복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트위터에 매일 징징댄 게 생각나요. 사람 때문에 울고, 돈이 없어서 또 울고, 얼른 자고 싶은데 해야 할 게 항상 많고. 내 인생 어떻게 되나 고민도 많았어요. 집은 언제 또 옮겨야 하나 걱정도 많고. 아, 집주인이랑 싸워서도 울었어요.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우리 엄마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 글쎄 집주인이 무단으로 제 방에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아까 기억을 왜곡한 것 같아요. 진실이 아니에요. 하긴 근데 진실이라는 게 뭐가 있겠어요. 또 몇 년 뒤에 얘기해보면 제 대답이 완전 다를 수도 있어요. 지금 보니까 서울에 살았던 시간은 내 인생에서 최악이었다고 할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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