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이민갈까? 24. 예민함이 비참함이 되지 않기 위해

알다퀴어이민

언니, 우리 이민갈까? 24. 예민함이 비참함이 되지 않기 위해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보통 사람들보다 자극을 더 많이, 더 강하게 받아들이는 예민한 사람들은 인생의 좋은 면, 나쁜 면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과 불의와 어려움에 더 민감하게 얽혀들어 갈 수 있다.

얼마 전 읽은 책 <예민함이라는 무기>에 등장한 구절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확실히 예민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붐비는 장소에서 유난히 스트레스를 받고, 소음에 민감하고 여행을 힘들어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잘 알아차리고, 폭력적인 장면에 영향을 많이 받고 사람을 만난 뒤 진이 빠지는 특성으로 묘사된 예민한 사람이 빠짐없이 나를 닮아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풍경조차 과도한 자극이 될 수도 있다는 부분을 읽고 무릎을 쳤는데, 아름답든 아니든 행복이든 고통이든 인간이든 사물이든 강한 자극에는 무조건 취약한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예민함을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했지만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나는 고양이도 아닌데 낯선 곳에만 가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경계하며 주위를 살피는 기간을 갖는다. 두통이나 몸살과 같은 신체적 증상이 따라오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또 한 번 따뜻해지던 뉴질랜드를 떠나 추워지기 시작한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감기를 심하게 앓았고, 평소보다 심해진 생리통에 일정을 모두 취소해야 했다.

두 나라를
오고 가는 예민함

예민한 사람에게 삶의 터전을 자주 바꾸는 일 역시 당연히 부담이 된다. 짐을 옮겨야 하고, 필요한 물건을 챙겨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환경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것에 매번 스트레스를 받는다. 휴대폰에 연결되어 있던 뉴질랜드 계정을 로그아웃하고, 지웠던 한국에서 필요한 앱을 다시 다운받는다. 은행 어플도 업데이트하고, 통신사도 다시 한국 회사로 바꾸고, 정지해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풀거나 혹은 풀었던 걸 다시 정지한다. 신분증과 신용카드도 한국 전용으로 꺼내고 지갑 안을 정리하고 카드 배치를 새로 바꾼다. 나라를 오가며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아마 화장을 할 테니까 화장품을 넣은 파우치를 챙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될 테니 차 열쇠 대신 교통카드를 챙긴다. 한국은 길에서 내내 뭔가를 듣지 않으면 소음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이어폰도 필요하다. 두 나라의 날씨가 매우 다를 때면 옷이나 양말도 꼼꼼히 챙기고, 공항에서부터 입을 외투도 필요하다. 여행을 갈 때 짐을 챙기는 건 설레지만 피곤한 일이다. 여행도 아닌데 짐을 매번 챙기는 건 지겹기만 하다. 이런 일들을 매번 참아내며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 간다. 때로는 머물 수 있는 비자가 만료되어서, 돈이 부족해 일해야 하는데 뉴질랜드에는 취업 비자가 없어서, 혹은 한국에 있는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거나 내가 한국 병원에서 받던 치료를 지속해야 해서 한국 땅을 밟을 일이 생긴다. 

이민을 결심했다고 해서 한국에서의 삶이 완전히 단절되고 뉴질랜드에서 처음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국에 갈 때마다 뉴질랜드의 삶은 또 단절된다. 냉장고에 요리해야 할 식자재가 있고 자동차 수리를 맡겨야 하는데 모두 뒤로 하고 나라를 떠난다. 매번 비행기를 타야 하니 드는 시간과 비용도 무시할 수 없다. 자꾸만 애인과 장거리가 되는 것도 고통스럽다. 비용과 체력의 문제로 한번 갔다가 바로 돌아오기는 힘든 거리여서, 우리는 둘 중 하나가 한국에 가면 한 달 이상씩은 다녀온다. 그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져 우울해지곤 하고, 연락이 잘 닿지 않는 3~4시간의 시차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일러스트 이민

비자 신청의 후유증

우리의 이민 프로젝트는 분명 행복을 향한 여정이었지만 나는 비자를 신청할 때마다 우울해진다. 파트너십 비자의 특성상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와 우리 사이가 드러나는 사진이나 대화 자료를 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한국에서 결혼 서류와 공동 거주 증명서, 공동 재정 관련 서류가 없으니 관계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준비해야 하고, 그러고도 한 번에 신뢰를 받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도 비자를 신청 이후에 추가 자료 제출 요청을 받았다. 우리는 6년을 만났으나 커플로 인식될 자료가 별로 없다. 우리는 어색하게 옆에 서서 사진을 찍거나 서로 찍어주기는 잘해도 이성애자 커플처럼 아무 데서나 뽀뽀하면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얼핏 보면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커플 아이템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커플 목도리와, 역시 다른 사람이 보기엔 긴가민가할 법한 커플 운동화를 착용한다. 누가 봐도 커플 아이템인 물건을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커플 아이템이라고 들고 온 자료가 내가 봐도 억지 같아서, 같은 날에 샀고 서로 선물해줬으며 잘 보면 비슷하게 생긴 체크무늬라고 구차하게 설명을 붙인다. 그러니 한눈에 다정한 커플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이해는 된다. 

방금 인터넷에서 ‘몇 가지 서류를 준비하여 간단하게’ 파트너십 비자를 받았다는 이성애자 커플의 후기를 봤다. 그 글은 함께 살면서 결혼을 했고 출산을 했다는 내용의 레터와 여행 사진, 결혼 서류, 공동명의의 계좌 및 공과금, 집문서 등을 제출해서 간단하게 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도 이성애자 커플이었으면 결혼을 했다는 내용을 서류로 증명했을 것이고 부모와 가족, 직장 동료를 포함한 주변인들의 증언이 더 많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정식 부부가 아니었고 공동으로 소유한 계좌나 재산도 없었다. 그래서 변명처럼 보일지라도 자료마다 하나하나 정성껏 설명을 쓰고, 우리 사이의 친밀함을 보여줄 수 있는 대화도 60장쯤 캡처해 번역해서 첨부했다. 우리는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수고가 엄청나다.

익숙한 설움

모임 자리에서 늘 이성 연애를 과시하며 서로 안고 있는 이성애자 친구 커플이 있다. 우리는 그 자리에 호모포비아가 없다는 걸 알아도 집이 아닌 곳에서 그런 일을 하기는 조심스럽다. 뉴질랜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여전히 집에 들어오면 모든 문을 닫고 커튼을 친 이후에야 비로소 포옹한다. 여기서는 그럴 필요 없을지도 모르고, 오랜만에 감격의 상봉을 한 날이면 공항에서부터 얼싸안고 들어가고 싶기도 하지만, 이런 건 이미 오랜 습관으로 몸에 배어있다. 아무리 반가워도 바로 달려가 안기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먼저 커튼을 치는 관계를 이성애자들이 알까? 

얼마 전 한국으로 떠나오던 날이었다. 애인을 또 한참 못 본다는 생각에 밤새 잠도 못 자고 울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너무 많이 오길래 공항에 가기 전에 애인 출근길을 차로 바래다주고 그의 직장 앞에서 작별을 하게 되었다. ‘이제 진짜 가는구나. 잘 다녀와.’ 하면서 애인은 내 뺨을 만지려고 손을 올렸고, 우리는 둘 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 오고 있는지 주차장 입구를 확인했다. 아무도 오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애인은 내 뺨을 쓰다듬었고 우리는 인사를 마저 할 수 있었다. 나도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이성 연애할 때는 통화연결음에 남자친구 목소리를 해놓아서 부모님께 등짝을 맞기도 하고, 기념일이라고 동아리 모임에 양해를 구하고 함께 빠졌다. SNS에 연애 중임을 올려 축하의 댓글을 받는 걸 좋아했고, 케이크 자르고 이벤트도 하고 커플링을 맞추는 각본에 충실해 식상해보이는 연애마저도 좋아한다. 요즘이었으면 인스타 라이브로 생중계하거나 유튜브로 데이트 브이로그를 찍었을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사는 게 아닌데, 증거가 부족하다고 할 때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처럼 느껴져 화가 치민다.

아웃팅 걱정도 매번 사라지지 않는다. 뉴질랜드의 비자 신청은 정말 담당자마다 기준이 천차만별이어서,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직접 번역한 내용이 인정되지 않아 제삼자에게 번역 및 공증을 받았다. 예상지 못한 비용 지출도 문제였지만 역시 한국어를 하는 한국인에게 맡겨야 할 테니 아웃팅도 동시에 걱정해야 했다. 예전에는 비자 신청을 도와주는 한국 에이전시에 사진을 보내기 조심스러워 일부러 적당히 덜 다정해 보이는 걸로 고른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비자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이제는 그런 것까지도 다 내려놓았다. 아웃팅을 무릅쓰고 집주인에게 우리가 동거 중이라는 증언까지 부탁했고, 좀 더 신뢰도 높은 증언을 얻기 위해 엄마에게 커밍아웃도 했다. 비자로 인해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정체성을 오픈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비참함을 느낀다. 비자가 승인되지 않으면 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서, 이러한 중대한 위기 앞에 모든 걸 감수하는 건 우리 둘 다 똑같다. 내가 엄마에게 증언을 부탁했던 것처럼, 애인은 직장 동료에게 증인이 되어달라고 연락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동분서주 했지만, 정말 마지막 순간에는 또 우리 둘다 ‘그런데 정말 받아야 할까?’ 망설인다. 그 망설임 또한 서로가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며 무리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조금 더 안전한 방식으로 증거를 모으려고 노력한다. 담당 이민관이 이성애자라면 떳떳하고 안정적인 커플이 주변에 증언이나 레터를 부탁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절대로 모르실 게 분명하다. 나는 이 과정에서 잘 붙들고 있는 줄 알았던 감정 조절의 끈이 때때로 거하게 무너진다. 모든 게 영어로 되어 있고, 해야 할 업무량 자체가 기한보다 과도하게 많은 건 조금 힘들지만 괜찮다. 문제는 이 익숙한 동성애자로서 겪는 비참한 기분을 다시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기분은 정말 익숙한 데도 지겹게 무뎌지지 않는다.

일러스트 이민

쿨해질 수 없는

비자 관련 추가 자료를 제출하라는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한국행 비행기 안에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 소식을 접했고 공항버스를 타고 부모님 집으로 향하던 두 시간을 내내 울었다. 또 지긋지긋한 증명의 여정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게 막막했다. 동시에 아직도 내가 이것 때문에 운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레즈비언이어서 서럽고 속이 터지고 억울하다. 햇수로 한 이십 년째 변함없이 억울한 것 같다. 동성애자의 억울함을 이제는 그만 좀 말하고 싶은데,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도 동성혼이 법제화되어도 이 억울함을 아마 오십 년은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헤테로 커플이 6년을 같이 살았고 증거가 이만큼 있어도 의심을 받았을지 궁금하다. 커플이 아닌 여성 두 명이 비자를 받기 위해 6년을 같이 살고 몇 년에 걸쳐 주기적으로 다정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성 간 섹슈얼 텐션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견의 산물은 아닐까? 담당 이민관이 우리에게 대는 잣대가 아시안이고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것은 아닌가? 피해의식인지 합리적 의심인지 모를 의문이 계속 고개를 든다. 우리는 쿨해질 수 없을 거다. 쿨해지기에는 우리의 인생과 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이성애자들처럼 아무 데서나 애정표현을 하며 찍은 사진은 앞으로도 계속 없을 거다. 이래도 안 믿는다면 정말 섹스 비디오라도 찍어서 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웃었지만, 우리는 사실 여전히 매사가 두렵고 상처를 받을 때마다 아프다.

이렇게 무뎌지지도 않는 예민한 사람이어서 한국 사회에 살 때 수시로 아팠다. 당연히 뉴질랜드라고 아주 평화로운 것은 아니지만, 내 정보력과 언어의 한계로 인해 자극을 감지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한국은 내가 너무 잘 아는 곳이고, 너무나 알 것 같은 고통을 접할 때가 많아서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심정적 거리를 두기가 어려웠다. 최근에도 여성 혐오 사회의 생존자였던 한 연예인이 끝끝내 삶을 중단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먹먹하고 우울해서 일상생활에 크게 타격을 받았다. 자극에 자주 압도당하는 나로서는 뉴질랜드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 살더라도 그곳이 한국만은 아니어야 할 것만 같다.

‘동성애 반대한다’던 한국 대통령은 지난 10월 18일 청와대 행사에 동성 부부인 주한 뉴질랜드 대사 부부를 초청함으로써 그 관계를 승인했다. 바로 이런 일들이 내 감정을 시시때때로 두드려 패는 것만 같다. 물론 고무적인 일이지만, 뉴스를 보고는 또다시 분노에 압도됐다. 당시 후보자였던 현 대통령의 해당 발언에 상처받았던, 여전히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에 살며 여전히 부부로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애자 국민으로서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내가 관계를 증명하기 어려운 설움이 또 한 번 사무쳐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이불을 끌어안은 채 숨죽여 울던 날이었다. 자료를 충분히 마련할 수 없는 이 나라에 살았던 게 문제인지 아니면 애초에 내가 문제인지 되물었고, 그동안 잘하고 있던 건강 관리가 무너졌으며, 익숙하지만 무뎌지지 않는 고통에 또 한 번 신음했다. 이런 차별은 실제로 아프다. 뉴스에 사건에 사람들의 말에 실제로 한 번씩 얻어맞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거다. 우리는 한국에 더는 살지 않겠지만, 대통령이 대사 부부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동성애자 국민도 동등하게 존중하고 조속히 관련 정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고통을 멈추고 차별에 반대하는 일에 시기상조는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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