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달리기 경주를 잘 못했다. 혼자 달리는 백미터 달리기는 잘해서 대표 선수로 뽑혀놓고도, 여럿이 경주만 하면 몸싸움에서 져서 자꾸만 뒤쳐졌다. 여러 명이 같이 출발하면 초반에 다른 선수들을 몸으로 밀어내며 뚫고 나가야 격차를 벌릴 수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항상 다른 선수들에게 양보해버렸다. 숨도 못쉬게 사람으로 꽉 찬 퇴근 시간 지하철 2호선 사당역에서 갑자기 그 달리기가 생각났다.
한국에서는 늘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지하철에서도 모질게 사람들을 밀치고 내려야 했고, 회사에서도 끈덕지게 일해야 했다. 야근에 회식이 이어져도 내 컨디션과 집안 꼴을 외면한 채 기를 쓰고 출근해야 했고, 농담이랍시고 성희롱을 던지는 상사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런 일상이 참 버거웠다. 매일매일 자꾸만 뭐가 그렇게도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싸우기 싫어서 먼저 양보하던 나는, 커서도 지하철에서 사람에 밀려 제때 내리지 못했고, 출근길 꽉 찬 버스에 다른 승객들을 밀어가며 올라타지 못하고 몇 대씩 그냥 보냈다. 이미 여러 명을 응대하고 있는 점원을 굳이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가며 원하는 제품을 찾지 못했고, 식당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직원을 차마 부르지 못해 밑반찬을 추가하지 못했다.
울면서 달리기
한국에서는 머뭇거리는 사이에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쉬웠다. 언제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다. 모두 망설임 없이 한 방향만 바라보며 뛰다시피 걷는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 ‘어, 이쪽이 맞나?’하고 잠시 두리번거렸다가는, 다들 귀찮다는 듯이 나를 치우고 지나가는 상황을 겪게 된다. 나 또한 어떤 커피를 마실지 고민하는 손님에게 ‘고객님 사이즈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 하며 다그치듯 주문을 독촉한 적이 있다. 뒤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엔 망설일 시간이 없다. 커리어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장과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해보려고 하면 이미 내가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영어점수도 엄청난 스펙도 없으면서 이미 백 명도 넘게 지원했다는 그 공고에 나까지 지원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아도 해볼 기회를 얻기 위해 또 수많은 것들을 해야 하는데, 그 긴 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간절하게 그 일을 원하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가 모두 경쟁하는 사회고 내가 달려야 할 트랙이 있는 걸 알면서, 거기서 탈락한 허무함과 불안감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인하지도 못했다. 다들 똑똑하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삶의 문턱마다, 나는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일단 아무데로나 정신없이 달려야 했다.
뉴질랜드로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일 년 전, 애인과 결혼하여 뉴질랜드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강남역에서 여성이 살해당하고, 장소만 다른 또 다른 강남역에서 수많은 우리가 죽어 나가는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더는 여기서 살 자신이 없어졌다. 이렇게 살다가는 정신없이 일하다 갑자기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들이 죽어 나가는 사회에서,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퀴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는 사회에서, 나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한시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늘 마음이 답답해졌다. 남겨질 고양이들과 애인을 생각하며 끝없이 슬퍼졌다.
그래서 무섭지만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둘 다 여성이고 평생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 외국에 살아본 적이 없다. 뉴질랜드에 연고가 전혀 없고, 모아둔 돈도 별로 없다. 그러나 나는 버티는 건 잘 못 해도 도망치는 건 잘하니까, 이번에 제대로 도망쳐서 한국을 떠나보기로 했다. 파트너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훌쩍 떠나기 위한 긴 준비를 시작했다. 어디든 돈이나 기술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유학인 것 같아, 학업에 대한 의지가 있는 파트너가 유학 준비를 했다. 나는 먼저 출국해 집을 알아보고 일을 구했다.
따뜻한 영어 쓰는 나라. 내가 원하는 외국의 조건이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영어밖에 없었고, 춥고 비가 오면 감기에 잘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뉴질랜드를 찾았다. 마침 뉴질랜드에 파트너가 원하는 학업과정이 있었고, 자료조사를 통해 만난 뉴질랜드가 꽤 마음에 들었다. 북섬을 기준으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고, 가늘고 긴 섬나라라 어디에서든 바다가 가까워 보였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뉴질랜드의 공식 언어에 영어와 함께 마오리어와 수어(수화)가 있었던 점이다. 공식 언어에서 원주민과 장애인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차별 없는 나라일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막상 떠날 때가 되니 길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가서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어차피 한국에서도 길을 잘 찾지 못해 지도를 보면서도 늘 헤맸다. 내가 아무리 한국말을 잘 알아들어도 고객님은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라떼를 시켰다고 우겼고, ‘학교는 나왔어요? 계산이 안 돼요?’ 하는 말은 차라리 알아듣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각자 사는 게 바빠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일 년에 한 번밖에 못봤고, 특별히 외롭지 않게 잘 살았었다.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처음에는 물론 난관이 많았다. 길을 많이 헤맸고, 일을 구하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비자는 언제나 생각한 타이밍에 맞춰 잘 나와주지 않았고, 통제 범위를 벗어나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이어졌다. 예상지 못했던 파트너의 건강 문제로 비자가 늦어지고, 고양이의 뉴질랜드 입국 절차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파트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생각처럼 따뜻하지 않았던 오클랜드의 비 오는 겨울을 지나며 자주 울었다. 영어를 못해서 서럽고 의지할 데가 없어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길고 지루한 과정 끝에 고양이들과 파트너가 모두 뉴질랜드 땅을 밟았을 때는, 나는 이미 혼자 집도 구하고 운전도 하고 밥도 해 먹고 일도 하며 완벽히 적응해 있었다.
미안해서 주문을 못 하는 사람. 조금 이상한 말이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놀랍게도 뉴질랜드에서는 나는 음식 주문을 잘한다. 한국처럼 직원들이 정신없이 바빠 보이지 않아서다. 여기선 사람들이 주변을 살필 만큼 여유가 있다. 마트에서 계산할 차례를 놓치더라도, 누군가 ‘네가 먼저 온거 맞지?’하며 자기 자리를 양보해준다. 식당에서 다들 정신없이 ‘저기요!’한다면 나는 또 기가 질려 주문을 못 했을 텐데, 다른 사람들도 직원이 바빠 보이면 살짝 손을 내리니까, 기다리면 내 차례가 아예 안 오지도 않는다. 내가 좀 놓치더라도 누군가 챙겨주고, 기다리면 내 차례가 영 안 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필사적으로 해야 할 게 별로 없다. 한국에서는 혼잡한 대중교통을 타는 게 힘들었는데, 여기는 사람 수가 적어서 덜하다.
뉴질랜드 전체 국가의 인구는 한국도 아니고 서울의 절반 정도고 부산보다 조금 더 많다. 게다가 전체 국토면적은 남한의 2.5배가 넘으니까, 경쟁할 일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서울보다는 한결 낫다. 다들 그렇게 치열하게 살지 않아서 근무환경도 좋다. 손님들은 커피가 늦게 나와도 바리스타를 독촉하지 않고, 동료들은 아프면 쉬고 실수해도 서로 비난하지 않는다. 임금이 높아서 몇몇 프랜차이즈를 제외하고는 직원들에게 야간근무나 초과근무를 시키기 어렵고, 휴일에 사람을 쓰면 비싸니까 사장들도 어쩔 수 없이 가게 문을 닫고 쉰다. 평소에도 오후 네 시 이후엔 카페가 문을 닫고, 식당이나 술집도 오후 열한 시 전에는 닫으니까 밤에는 집에 들어가서 잘 수밖에 없다. 밤 열두 시까지 매장 마감 청소를 하던 한국의 일상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어디서
안심하고 살 것인가
일 년 만에 들른 한국에서 버스에서 제때 내리지 못해 욕을 듣고, 급하게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치일 뻔하며 고향의 익숙한 어려움을 새삼 혹독하게 다시 한번 실감했다. 버스 기사가 밥도 못 먹고 근무하고 있고, 오토바이를 탄 노동자가 배달할 곳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아니까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무엇도 참 무뎌지지가 않았다. 길에서 무례한 사람을 매일 마주쳐도 매일 새롭게 화가 났고, 디지털 성범죄 뉴스를 매일 들어도 매일 새롭게 복장이 터졌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나에게는 참 중요했다. 물론 뉴질랜드에도 다른 어려움이 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불안한 비자에 늘 전전긍긍해야 하고,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정보를 찾거나 용무를 보기도 어렵다. 카드사나 보험사에 영어로 전화를 걸어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받지 못한 택배를 직접 찾으러 가야하고, 병원비가 비싸서 아파도 바로 병원에 가지 못한다. 손만 까딱하면 집 앞까지 갖다주던 한국의 생필품 배송과 배달음식이 매일매일 그립다.
그러나 오랜만에 숙소에 불법 촬영을 하는 카메라가 있는지 걱정하고, 오랜만에 택배에 붙은 주소지 부분을 잘게 찢으며, 한국에 살 수 없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쩌면 비자가 불안하고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외국인인 점이, 거리의 사람들이 불친절하고 남자들이 일상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 힘 빼고 일상을 살 수 있는 문제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소한 일들이 모여 하루를 망치고 그 하루가 모여 일 년을 망친다. 그럼 그 일들은 더는 사소한 게 아니다. 조금 급하다고 남을 밀치고 지나가지 않는 그 사람들이, 내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 도와주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만나면 정답게 인사하던 이웃들이, 일하던 카페의 손님이 쓰러졌을 때 당황한 나 대신 구급차를 불러주던 이웃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서 나는 조금 더 안심하고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