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카와 구,
니시닛뽀리(荒川区、西日暮里)
어학원에 들어온지 3일째. 입학식과 함께 바로 반 배정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우선 응시자 본인이 ‘초~중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중~고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서 각자 다른 층에서 시험을 본다. 시험은 어휘와 작문으로 이루어지며, 다 치르고 나면 희망하는 시간대(오전 또는 오후)를 골라서 제출하면 끝이다.
나는 10년도 더 전에 일본어능력시험 2급을 땄던 사람이라 ‘지금쯤이면 다 까먹었겠군’이라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초중급 단계에 응시했다. 그런데 마지막 작문시험 문제에서 턱 걸리고 말았다.
‘본인이 일본에 온 이유는? 향후의 일본어 공부 계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왔다'는 말 한 마디 말고 뭘 써야 할까? 지금이야 이리저리 생각해서 내겠지만, 그 때는 머리가 텅 빈 것만 같았다. 특히 당시엔 재류카드다, 마이넘버다, 통장 개설이다, 폰 번호 개통이다 뭐니뭐니 해서 정신이 없었을 때였다(당장 그 날 오후에 은행부터 가야했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의 시험지를 냈다. 시간대는 오전으로 선택했다. 일단 편의점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아르바이트, 즉 음식점과 카페는 보통 오전 10시나 11시 개점이 기본 아니던가. 평일 오후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다면 이자카야로 직행인데. 윽, 나에게 이자카야는 도저히 무리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길빵만 해도 괴로운데, 그 담배냄새를 내내 맡으며 일하라고?
알바 면접을 끝낸 다음 다음날. 공개된 반 배정 결과는 참혹했다.
초급 2반, 오전
잠깐, 저기요. 초급 2반? 초급 1반에서 히라가나랑 카타카나 떼고 올라오는 다음 반이 초급 2반인데? 아무리 옛날 옛적이라도 JLPT 2급 딴 사람한테 이건 좀 심하지 않나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룸메이트(JLPT N1 보유예정자)한테 물어보았다.
"언니는 무슨 반 되었나요?"
“나? 중급 1반.”
"그거 초급 끝나고 올라가는 반 아니에요? 언닌 일어능력시험 1급 붙었다면서요."
“안 그래도 그렇게 말하니까 가채점 결과일 뿐 아직 결과는 모르지 않냐고 하더라고.
나중에 성적표 가져오면 반 바꾸는 거 검토는 해보겠다고는 하는데…
일단 당장 내일부터 수업일이니까 나가서 판단하려고.”
"언닌 일본 취업을 목적으로 온 거 아니에요? 취업반도 당장 내일 모레 개강이던데. 그거 성적표 나오는 건 거의 한 달 후에나 나오잖아요?"
“안 되면 이번 학기는 그냥 중급반 다니고, 성적표 나오면 다음 학기부터 취업전문반을 다닐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결국 시험 결과에 납득하지 못하고, 홀로 행정실에 반 배정 결과를 따지러 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정 반을 바꾸고 싶다면 선생님들한테 문의하세요." 자기 반에 인원 느는 거 좋아할 강사가 어딨다고 반을 바꿔주겠냐? 라고 항변하려고 했으나, 바로 옆 상담창구에서 들리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저기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일능시 N4급 있는데 초급 1반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전 글자는 다 안다고요.”
“학생, 저희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요, 시험 결과가 그렇게 나온 거니까 그냥 기초부터 배운다고 생각하고 공부하세요.”
이게 문제다. 애초에 학생들의 비자 발급 권한 과정에서 유학원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에, 학생은 어느 경우에라도 슈퍼 을의 위치다. 고작 1시간 동안 본 시험 결과로 그 간의 자격증도 싹 무시하고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부터 배우게 하는 이유가 뭘까? 과연 그 학생의 기초 실력 함양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든 학생들이 한 학기라도 더 다니게 하려는 것일까? 참고로 한 학기 학원비는 25만엔이다. 거의 한 학기 대학 등록금에 준하는 비용이다.
반 배정 레벨이 터무니 없이 낮은들, 어쩌겠는가? 학기가 시작된 지금, 이제 와서 학원을 바꾸는 과정은 굉장히 번거롭고 귀찮다. 대부분의 유학원이 학기가 이미 시작되면 ‘특별한 사유 없이’(예를 들면 취업. 귀국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지출한 학원비는 환불해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도쿄 거주 사촌은 “야, 그거 불법이야! 고소해!”라고 화를 냈지만, 외국인 유학생에게 그럴 시간과 비용과 언어 능력이 있겠는가? 정말 정말 '엿 같아서' 학원을 바꾼다면 거의 40만엔에 육박하는 입학금과 교재비와 등록금을 고스란히 다시 지출해야 한다. 이런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유학생은 그렇게 많지 않다.
전기 도둑?
결국 초급 2반을 선택했지만, 시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수업이다보니 사소한 것 하나 하나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한자에 대해 '잽스플레인'을 시전하는 강사. 대륙에서 20년 넘게 한자를 모국어로 쓰고 살아온 사람한테, 삐침 하나 빼먹었다고 한자 모르는 사람 취급하기.
80년대부터 업데이트를 하지 않은 것 같은 교과서. 대화 예시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80년대 버블 시대의 복장과 마츠다 세이코의 머리 스타일. 화면에 등장하는 엄청나게 두꺼운 모니터, 펄럭이는 양복... 아무리 80년대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일본어는 변하지 않았다지만, 이 교과서에 나오는 분들은 지금쯤 환갑잔치 열고 계실 것 같은데요.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사건이 있었으니. 어느 날,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져서 교실 뒤쪽에 있는 충전 콘센트에서 핸드폰을 충전하고 있었다. 그 때, 강사가 나를 불렀다.
“몰래 상.”
“?”
“일본에선 카페랑 학원 같은 공공장소에서 핸드폰을 충전하면 안 돼요.”
"왜요? (누가 훔쳐가나?)”
“그런 행위를 일본에서는 전기 도둑電気どろぼう라고 해요.”
뭐?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저기요. 이 학원의 재무재표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당신의 월급, 교재비, 이 학원의 전기세, 수도세, 기타 등등을 포함한 그 모든 비용이 제 학원비에 포함되어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럼 내가 느그들을 학원비 도둑이라고 불러도 되냐? 아니, 내가 롯데리아 가서 케찹 50개 훔쳐나온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는 내가 지불한 비용에서 빠져나가는 걸 쓰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도둑? 도둑??? 도둑은 호텔에서 커피포트나 드라이기 들고 나오는 걸 도둑이라고 하는 거지, 이 자식들아!
(나중에 알고 보니 애초에 일본 카페에는 콘센트와 와이파이를 구비한 곳들이 드물었다. 전기를 훔치고 싶어도 훔칠 수가 없네요!)
물론 거기 있던 모든 한국 유학생들의 반응은 "어이없다~"였다. 그 강사는 "아무튼 일본에선 도둑이에요!" 라고 또 한 번 근거 없는 잽스플레인을 시전했다. 나는 이미 그 발언으로 학원에 대한 신뢰도가 0를 찍고 말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학원 기숙사에 처음 도착한 날, 나는 투룸인 201호 안의 또 다른 방에 배정된 룸메와 방을 바꿨었다. 즉, 원래라면 내가 201a였고, 친구가 201b였지만, 친구 방의 채광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친구가 흔쾌히 방을 바꿔준 것이다.
어느 날, 기숙사 열쇠를 깜빡하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하필이면 그 날 201b방을 함께 쓰는 룸메 언니가 문을 잠그고 불금을 즐기러 놀러가 버렸다. 행정실에는 예비 열쇠가 있을 것이기에, 잠시 빌려서 문만 열려고 했다.
그런데 행정실 최고참 일본인 아재가 내 방을 201a에서 201b로 임의로 바꿨다는 말에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 아재는 한국어도 할 수 있다. 이 대화는 한국어로 이루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를 해야지!”
“(왜 반말이야?) 같은 방 안이라서 말 안 해도 되는 줄 알았어요.”
“그걸 왜 니 맘대로 생각해! 이거 학원 규칙 위반인 거 알아? 내가 너 방 빼게 할 수도 있어!”
내 잘못이 없진 않지만, 지금 이 말투는 드라마에 나올 법한 집 주인의 갑질 대사와 판박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유학원 쪽이 집 주인인 건 맞지만, 201호에서 202호로 방을 바꾼 것도 아니고, 니가 뭔데 나한테 반말로 방 빼라 마라 운운이세요?
정말로 굉장히 화가 났지만, “그럼 내 방 빼시던가요, 이 XX야”라고 심한 말을 할 뻔했지만… 내가 그 말을 하게 되는 순간 최악의 경우 201a의 내 다른 룸메도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나가면 그만이지만, 내 룸메는 그렇지 않다. 그 친구는 어쨌든 유학비자에 매여있는 상황이고, 내 기분대로 했다가 그 사람의 상황을 악화시킬 수는 없었다. 같은 룸메로서 상도덕이란 게 있지 않은가.
꾹 참고 열쇠를 돌려주러 갔더니, 행정실 아재는 그제야 자기도 말이 좀 심했다는 걸 알았는지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말이었다.)
“열쇠는 찾았어? 이게 마이넘버랑 재류카드 주소가 연관되어 있는 상황이라, 괜히 주소 바꿨다가 나중에 기재된 주소랑 다른 게 발견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다음부턴 조심하는 게 몰래 상한테도 좋지 않을까 해서~”
아니. 우리 사이에 다음은 없어요.
2017년 9월15일. 원래는 9월30일까지 기숙사에 머물 수 있었지만,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는 짐을 챙겨 기숙사를 나왔다. 정확히 한 달 반 만에 나는 드디어 평생 동안 유지해왔던 학생의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니시닛포리西日暮里에서 키타센쥬北千住로 거처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