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구, 시부야
渋谷区、渋谷
한국계 뷰티 회사 O의 온라인 마케팅 1팀.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단 ‘정직원’ 직함이었다.
실은 여기 말고도 한국계 회사 면접을 꽤 여러 군데 봤다. 합격 통보를 받은 곳도 복수 있었지만, 마음에 쏙 드는 곳이 없어서 고민했다. 그나마 이 회사를 고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업계와 직종. 한국계 뷰티 회사의 온라인 마케팅. 비록 닷새 만에 그만둔 바람에 제대로 배워보지는 못했지만, 구글 애널리틱스 등등 온라인 마케팅 툴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점이 미래의 이직에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둘째, 당분간은 도저히 일본인들만 있는 조직 사이에 낄 자신이 없었다. 여태까지의 수많은 똥 투척으로 나는 일본인들에게 좀 많이 질려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복지 좋고 시스템 좋은 오오테(大手, 대기업)를 들어가도 당장 내 사수가 혐한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회사는 일이 반, 사람이 반인데.
이 회사는 처음 면접장에서 봤던 ‘사람’의 이미지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나를 인터뷰한 사람은 온라인 마케팅 팀장이었는데, 나름 옷차림도 괜찮았고 말투도 신사적이었다. ‘면접관인데 당연하지 않냐?’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 꼰대들의 실상은 처참하다. 면접장에서 대놓고 ‘우리 회사는 군대식인데 젊은 여자분이 괜찮겠어? 허허허’ 하는 아재들도 있었으니.
일본어 할 줄 아는 거 빼고는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코딱지만한 회사에서 차장이랑 부장 직급 달고 거들먹거리는 꼬라지를 보느니 차라리 일본 여초 회사에서 일로만 고통받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그는 마지막 순간 굉장히 거슬리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
“저희 회사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
“돈을 적게 줘요. 이것만은 제가 분명히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분명히 좋은 경험이 되고, 나중에 전직할 때 온라인 마케팅 경험이 좋은 밑바탕으로 작용하겠지만(이미 전직할 것을 전제하고 말하고 있었다) 저희 회사가 업계 평균에 비해서도 급여가 짠 것은 사실이에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차라리 솔직한 것이 낫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밥이라도 주면
덜 서러울 텐데
일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초년 연봉 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다.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기본적으로 월급은 20만엔 언저리에서 시작한다. 보통 세전 월급이 정확히 20만엔이다. '뭐야, 그걸로 도쿄에서 살 수 있어?'라고 물으시는 분들. 말했잖아요. 일본 청년들은 그냥 헝그리라니까.
그래서 대기업은 교통비니 집세 보조니 각종 기타 보조수당을 붙이는 방식으로 작고 귀여운(귀여운 것에 환장하는 나라인 건 알고 있지만 월급이 귀여우면 어쩌란 말인지) 월급을 커버하려고 애쓴다.
문제는.
첫째, 세금이 미친 듯이 높다. 이건 이번 2019년 5월, 내 세전 월급이 약 25만엔, 세후 월급이 약 19만엔(진짜다) 인 것으로 한 줄 요약을 마친다. 진짜 욕해도 되나요?
둘째,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수당’은 지극히 한정된 범위에 그친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에는 없고 한국에는 있는 수당의 대표적인 예, ‘식비’.
한국은 일단 좀 괜찮은 기업이라면 으레 ‘식비’나 혹은 ‘식권’, ‘구내 식당’의 방식으로, 가급적이면 ‘밥’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그러나 일본인들은 ‘회사에서 왜 밥을 줘?’라고 생각한다.
자세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저번 4컷 만화에 출연한 바 있는 은행원 청년 소우 상과 나의 대화를 인용해본다.
“소우 상, 저번 회사는 식비를 줬는데, 이번 회사는 식비 없이 휴게실(refresh room. 일본어로 레후렛슈-루무…라고 한다. 저걸 발음하고 있으면 현타가 온다)에 음식을 갖다놓더라고요. 어차피 컵라면이나 인스턴트 식품이 전부인데, 식비로 제공하는 게 세금 면에서도 그렇고 더 낫지 않나요?”
“회사에서 식비를 줘요?”
“일본은 안 줘요?”
“왜 줘요? 밥은 개인적으로 사먹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하는 시간 중에 밥을 먹고, 또 일을 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복지적 관점에서 밥은 지급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학교에서 급식을 하는 것처럼?”
“한국은 모든 학교에서 급식을 해요?”
“안 해요? 기본적으로 중학교는 무상 급식, 고등학교는 석식까지 제공하는데…?”
“아… 일단 일본은 도시락을 싸오는 게 기본이에요. 한국은 역시 맞벌이가 활성화되어서 그런가….(일본에선 그런 이미지인가 봅니다) 그런 점은 확실히 성장기의 학생들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회사는 어쨌든 일을 하는 곳이고, 일에 상관없는 수당이기 때문에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그 돈으로 먹는 사람이 있고 안 먹는 사람이 있을텐데, 그러면 그 과정에서 불공평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그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다니 일본인들의 ‘공평’의 관점은 대체 무엇일까???? 이 말은 차마 소리내어 하지 못했다.) 어…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불공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일단 회사에 출근한 이상 회사는 그 시간 안에서 노동자에게 발생하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령, 영업사원들에게 영업에 필요한 ‘접대비’를 제공하는 것은 업무 비용으로 인정하잖아요. 은행원이니까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공되는 식비를 식사에 쓰는 사람도 있고 안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걸 어떻게 쓸지는 노동자의 재량권에 속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악용되는 부분을 걱정해서 인간적으로, 기본적으로 필요한 비용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핑계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렇다고 할까, 기본적으로 밥을 안 먹으면 일을 못하잖아요! (내 안의 한국인이 폭발했다) 회사에 나와서 일을 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건 회사가 응당 사원에게 제공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뜩이나 일본도 잔업이 많은 사회인데 밥도 못 먹고 일하면 너무 슬프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인은 밥심으로 일한다는 말이 있어서요. 하핫’이라고 하면 되었는데, ‘밥심’을 머릿속에서 제대로 번역을 못 해서 저 사단이 났다. 외국 생활에서 언어 능력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편의점 도시락의 슬픔
한국의 SNS를 보면, 으레 ‘여행’을 테마로 하는 계정에서 유독 “일본 편의점 털기”, “가성비가 내려오는 일본 편의점 음식들!” 같은 게시물이 심심찮게 업로드된다. 살고 있는 입장에선 정말 이마를 짚게 되는 글들이다.
일본은 회사에서 식비를 제공한다는 개념이 희박하기 때문에, 결국 직장인들은 나가서 사먹거나 도시락을 싸와야 한다. 하지만 (특히 혼자 사는) 직장인이 매일매일 도시락을 싸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나가서 사먹기엔 도쿄 오피스 가의 점심 가격대는 1000엔에 육박한다. 매일매일 사먹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싸고 간편한 편의점 도시락이나 컵라면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일본 편의점 도시락이 가성비가 좋다고 한들, 편의점 도시락은 편의점 도시락이다. 당연히 그 퀄리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일본은 ‘식사시간에 같이 밥을 먹는다’라는 인식도 없다. 우리나라는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 삼삼오오 함께 나가서 밖에서 사먹고 오거나 구내 식당을 같이 가서 먹는 모습이 보편적이지만, 일본은 일부러 ‘같이 나가서 먹죠’라고 미리 말해 두지 않으면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이 디폴트값이다.
즉 밖에 나가서 같이 밥을 먹는 것보다는 편의점 도시락을 사와서 각자 자리에 앉아 혼자 먹는 모습이 더 일반적인 풍경이다. 좋게 보면 개인 시간 존중, 나쁘게 말하면 정이 없는 거겠지. 나는 전자의 관점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개인시간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 대해서는 회사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라는 그 생각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도 살인적인 야근시간으로 점심과 저녁을 전부 회사에서 먹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럼 대충 배만 채우고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인가. 사축이라는 자조적인 용어가 있더라도, 가축도 최소한 밥은 준다.
한 가지 더. 일본은 그래서 회식 (飲み会)도 개인별로 돈을 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와리깡(割り勘), 즉 더치페이’다. 아무리 회식은 가도 자유 안 가도 자유라지만, 회사 생활을 하는 이상 모든 회식에 불참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여기도 인간관계라는 게 있는데? 또한 회사 회식이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갈 리가 있겠는가? 그런 곳은 한 사람당 3-4천엔에 달하는 비용이 ‘기본’이다.
결국 회식은 회식대로 가야 하고 돈은 돈대로 쓰는 눈물 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셋째, 서비스 잔업(サ-ビス残業). 주간 일정 시간까지 야근(잔업)은 월급에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추가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20시간인데, 말이 20시간이지 매일매일 하루에 한 시간 야근해도 수당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들어간 뷰티업계 회사는 당연하게도 저 모든 악조건을 갖춘 회사였다. 작고 귀여운 월급, 교통비 외에 보조 수당 없음, 서비스 잔업 20시간. 나는 근로계약서를 쓸 때 그 사실을 알았고, 도장을 찍는 손이 나도 모르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3개월은 시용기간(試用期間)이라고 해서 월급도 덜 준다. 그것까지는 알고 왔다. 시용기간에는 야근을 하지 않는다. 대신, 시용기간이 끝나면 정상 월급을 주지만, 그 안에는 잔업시간 20시간이 포함되어 있어서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좀 많이 어이가 없었다. 시부야 교차로의 하치공(ハチ公,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의 상징인 강아지 동상)을 데려와서 쟤 물어! 라고 하고 싶었을 정도로.
그래, 외국 생활의 기본은 존버이다…! 존버는 승리한다…! 면접관도 면접장에서 대놓고 말하지 않았는가! 3년만 일하면 좋은 전직 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저쪽이 먼저 저렇게 말했으면 애초에 나한테 거는 기대도 별로 크지 않을 터! 주는 만큼만 일한다!
이상한 낯익은 풍경
이런 마음으로 첫 출근일이 되었다. 타임카드를 찍고 들어가자마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뭐지? 이 미묘한 기시감은? 오전 타임 내내 다른 팀들의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고, 이윽고 그 기시감의 정체를 발견했다.
사원은 전부 여자였는데, 팀장은 전부 남자였다. 그것도 한국 남자들.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니, 여기 뷰티업계잖아? 물론 유리천장은 업계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최소한 관리자급에 여자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는 거 아냐? 저기 앉아있는 사원이랑 팀장이랑 근속년수도 비슷한 거 같은데 어째서 너는 팀장이고 저분은 아직 사원이야?
한국 기업이라서 한국인들을 관리자급으로 앉혀놓은 걸까? 근데 그러면 그거대로 문제 아닌가, 어쨌든 여긴 일본이고, 소비자층도 일본 여성들이고, 그렇다면 일본 여성들이 더 필요할텐데…으으 모르겠다. 괜찮아, 어차피 나는 잠시 일하다 떠날 사람이야.
하지만 문제는 역시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이쯤 되면 이 시리즈 단골 멘트 아닐까?) 점심 시간을 지나 오후 근무를 할 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가 내 귀를 때리는 것이다.
이런 시X, 일 똑바로 안 해?
네?
놀라서 팀장 쪽을 바라보니, 그 젠틀해 보였던 사람이 수화기에 대고 온갖 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이국 땅에서 들리는 반가운(?) 고국의 언어란. 근데 그 말은 회사에서 하기엔 좀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첫 출근한 신입사원 앞에서 벌써부터 저런 모습 보여도 되나?
놀라서 옆의 사원들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분들 분명히 한국어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다들 점심시간에 저랑 한국어로 짧지만 대화하셨잖아요. 저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내가 다른 곳에서도 (인턴이었지만) 일해봤지만 저 정도로 심한 욕설을 사무실에서 대놓고 한 곳은 없었는데?
팀장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씩씩거리며 나갈 때쯤, 옆자리의 직원이 나를 돌아보며 얘기했다.
많이 놀랐죠? 근데 저 분 자주 저래요. 거래처에 전화할 때나 저러지, 직원들한테는 웬만큼 화나지 않으면 저 정도 말은 안 해요.
웬만큼 화나면 한다는 얘기잖아요.
에이, 몰래 씨는 아직 신입이니까, 괜찮아요. 시키는 일 똑바로 하고 야루키 보여주면 될 거에요!
그래, 뭐, 내 할 일만 잘하면 되니까. 나한테만 욕 안 하면 괜찮겠지. 그런데 월급은 월급대로 짜고, 회사는 회사대로 멀고, 거기다가 보조 수당은 제로에 가까운… 아, 이거 뭔가 쎄한데. 이 쎄한 기분, 이제까지 너무 많이 느껴봤는데.
팀장의 욕설은 그 다음날, 다다음날에도 이어졌다. 다른 여자 직원에게 “일 똑바로 안해? 연차 n년인데 아직도 이런 식으로밖에 일 못해?” 라고 폭언을 퍼붓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 쎄함은 이윽고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과연 저 정도 연차에게까지 서슴없이 저런 말을 하는데, 신입사원인 나는 오죽하겠는가? 봐주는 것과 만만히 보는 것은 한끝 차이인데?
동아줄?
그렇게 5일 째 되는 날,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누구세요?”
“아 몰래씨, 안녕하세요. 저 저번에 봤던 N 회사의 S 차장인데, 기억하시죠?”
“(아 그 꼰대삘 풀풀 풍기던 아재….) 아 예,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는 몰래 씨가 저희 회사에서 어떻게 꼭 좀 일해주셨으면 해서요. 마케팅 직인데, 몰래 씨가 적임인 것 같아요.”
“저기 근데 제가 지금 다른 회사에서… 일을 할지도 모르겠어서요…”
“에이, 여기가 다른 회사보다는 나을 텐데…”
“(뭐야 니가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근자감 쩌네 진짜….)하하, 어떤 부분이신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아 일단 저희 회사는 집세 보조가 무조건 4만엔까지 나오고요, 회사폰을 아이폰8으로 지급하고, 식대도 하루에 1천엔으로 쳐서 일수대로 계산해서 지급됩니다. 시용기간은 한 3개월 정도 있지만 몰래 씨는 뭐 잘할 것 같으니 짧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밖에 또 뭐가 있나?”
“그래서 언제부터 출근하면 되죠?”
첫 직장에 다닌지 5일 만에 ‘환승 이직’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