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3구 표류기 에필로그. 스기나미 구, 아사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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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23구 표류기 에필로그. 스기나미 구, 아사가야

몰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스기나미 구, 아사가야
杉並区、阿佐ヶ谷

6년 전만 해도 내가 외국에 나와서 살 것이라고도, 그것이 일본이 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런 것 치고는 변화의 진폭이 너무한 것 같은데요.

6년 전의 내가 지금 나를 본다면, “왜 거기 있어?”라고 할 것이다. 6년 후의 내가 지금 나를 보아도, ‘왜 거기 있어…”라고 할 것이다. 이번 시리즈를 쓰면서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느낀 점이 있다. 이게 나라냐? 역시 탈본만이 답이다. 내가 일본 국적이었으면 아찍탈(아베 찍고 탈본)했다, 이 자식들아. 다 망했으면.

탈본의 첫째 이유는 세금이다. 세금, 이젠 말하면 입 아프다. 후생연금, 소득세, 더군다나 주민세와 특별도민세(도쿄도에서 도민들에게 걷어가는 세금)까지 합하면 세전 월급의 30%에 달하는 돈을 고스란히 지불하게 된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일본인 도쿄도민이 내는 세금과 내가 내는 세금이 똑같다고 해서, 내가 이 나라에서 그만큼 평등한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영주권 비자 취득은 기본적으로 10년 이상은 일본에 체류해야 하며, 영주권자라고 해서 일본 국민만큼의 대우를 보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선거권도 없고, 주택론도 못 받는다. 더군다나 이대로라면 머지 않아 일본의 국가 재정이 파탄날 것이 뻔한데, (최근 여당 국회의원이 연금이 부족할 것을 대비하여 ‘2천만엔을 모아놔라’라고 한 것이 알려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실제 그 상황이 닥친다면 외국인에게 주는 연금부터 삭감할 것임은 명약관화다.

둘째 이유는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만일 도쿄에 내일 모레 대지진이 난다고 하자. 가족도,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누가 날 지켜줄 것인가? 아베와 자민당 정권? 경찰? 우리 회사? 내 직장 동료? 나한테서 한국어 레슨 받는 학생들? 그나마 그들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지도. 믿습니다, 스구루상. 우리 원투데이 본 사이 아니잖아요.

농담은 접어두고, 가장 근접한 답은 대한민국 외교부가 아닐까. 일본 정부에게 세금은 세금대로 뜯기는 와중에, 내가 여기서 자연 재해나 강력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면 결국 날 지켜줄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떠나온 내 나라다. 아니면 여기 살고 있는 한국인들 정도. 나라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일본 정부나 공공기관이 나를 지켜줄 확률은 0에 가깝다. 길에 사람이 쓰러져있어도 슥 보고 지나치는 나라에서, 연고 하나 없는 외국인 여자애를 해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만일 우리 사촌처럼 일본인과 결혼을 한다면 어느 정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사촌은 남자라는 점을 감안하자. 내가? 일본에서? 결혼을? 일남과?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줄인다. 설령 여자분하고 결혼한다 해도….(도쿄 시부야 구와 세타가야 구는 동성 파트너십이 인정된다) 솔직히 언제 떠날 줄 모르는 외국인 주제에 한 여성분 인생을 꼬아놓기에는 너무 미안하지 않나.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일러스트 이민

2년 전 나리타 공항에 24인치 캐리어 하나 들고 내렸던 워홀러가 지금은 월세에 고통받는 어엿한(?) 도쿄 직장인이 됐다. 6년 전 대학생이었던 내가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만큼, 앞으로 인생 또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그때는 일본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을 수밖에.

가능하면 일본이 아닌 다른 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그나마 좀 알아듣고 말할 수 있는 일본에서조차 상황 파악 능력과 어휘 구사력이 한국에 있을 때의 반의 반도 안 되니, 솔직히 자신은 없다. 이게 워홀러일 때나 알바생 신분일 때는 정해진 말만 해서 몰랐지만, 실제 ‘외노자’로서 회사에서 일을 하자니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다. 매일매일 한 손을 묶어놓고 싸우는 것 같다. 전화를 할 때, 메일을 쓸 때, 상사에게 무언가 질문을 할 때, 회의를 할 때, 그야말로 여덟 시간 동안 JLPT(일본어 능력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기분이다. 아니다, JLPT에 OPIC도 추가요.

머리를 풀 파워로 가동해도 모국어 구사자들 속도의 반도 못 따라갈 때는 정말… 내가 한국어만 쓸 수 있어도 쟤네보다는 똑똑할텐데(진짜로) 자괴감 들고 괴롭다. 뭐, 누구를 원망하리오. 그저 하루하루 따라가느라 애를 쓰는 것 이외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도 고급 이자카야 같은 데만 가도 메뉴의 반 정도는 못 읽는다. 읽을 수 있어도 뜻을 모른다. 생선 이름, 고기 부위, 야채, 과일, 소스, 요리법… 한국 음식점을 가도 ‘뭐야 이거?’ 싶은 것도 있고. 이런 문제가 어딜 가나 반복된다. 신문 기사를 읽을 때, 법조문을 읽을 때, 어려운 전문 잡지를 읽을 때, 세로 쓰기 책을 읽을 때(제발 세로쓰기를 멈춰주세요 일본인), 더 가볍게는 직장 동료들의 말장난이나 그들의 추억팔이에 끼지 못할 때 등등. 이럴 때마다 외계 행성에 떨어진 지구인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국어 화자로서의 나와 일본어 화자로서의 나 사이의 괴리감을 확인하며 사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이 자존심을 깎아먹는 일이다. 일본어로는 한국어어휘력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가고, 중학생 정도의 어휘 수준으로 꾸역꾸역 내 의사를 어색하게 전달할 수밖에 없으며, 그놈의 비즈니스 경어 는 머릿속에서 몇 번을 되새김질해서 말해야 하는지. 외국인이니까 괜찮아, 라고 내 주변 일본 사람들은 말하지만, 상대 쪽에서 저렇게 공손한 언어로 응대해오면 이쪽은 진짜 부담되거든요…!

일종의 특권

아무튼, 10편이 끝난 시점은 2018년 6월이니, 그때로부터 현재까지 약 1년이 흘렀다. 아주 사소한 부분들이 몇 개 변했다. 이제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가 아닌 취로비자로 체류하는 외노자의 신분이 되었고, 일본어가 아주 조금 더 늘었고, 스기나미 구에 내 방이 생겼고, 정규직이 되었고 투잡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한국어 과외를 하고 있다. 말이 한국어 과외이고 실은 내 학생들이 나한테 역으로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게 함정이지만.

취직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인다운 짜증이 솟구친다. 여전히 일남들은 나를 빡치게 하며, 내일 다시 말 안 통하는 팀장놈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혈압이 오른다. 여전히, 인간이 제일 문제다.

다만 워홀을 통해 얻은 좋은 점이 있다. 하도 별 희한한 놈들 다 만나면서 개고생을 하다보니 직장에서 하급 어그로들 따위는 코웃음치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멘탈이 단련되었다. 무엇보다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히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기에, 나도 몰랐던 나를 알게 되기도 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가장 내 마음이 편한지, 나는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과 있을 때 덜 불편한지 등등.

그런 의미에서, 내 워홀 생활은 사실 일종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한국에 친구도, 가족도, 돌아갈 곳도 없었으면? 초기 생활 자금을 모부님에게 지원받지 못했다면? 힘들 때 언제든 돌아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가끔이라도 놀러 와주는 친구들이 없었다면? 이제껏 견뎌올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내가 힘들면 이 나라를 떠날 수 있었다는 믿음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냐. 나는 언젠가는 내 나라로 돌아갈거야, 라는 다짐.

첫번째 회사에서 퇴사했을 때 귀국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새로 시작한 과외 학생 때문이었다. 진짜 그 이유였다(…). 시작한 지 한 달만에 떠나기는 좀 염치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 학생들한테 더 정붙이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전에, 도쿄 곳곳에 더 추억이 쌓이기 전에,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얼른 사라지는 게 나한테도, 서로에게도 좋지 않을까.

그런가보다 하는 건
내가 아니라서

일러스트 이민

도쿄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면 편한 곳이다.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왜 지하철 요금은 이렇게 비쌀까, 왜 한 달에 몇 번은 선로 투신 자살사고가 일어날까, 왜 아베는 4선을 바라보고 있을까, 왜 여자들은 여름에도 항상 스타킹과 구두를 신고 있을까, 왜 일본 직장인들은 모두 검은 양복만 입을까.

그런 자잘한 의문을 갖지 않고, 인신사고로 인한 지하철 지연을 납득하고(가끔 짜증을 내고), 회사에 출근해서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퇴근해서는 하이볼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봄에는 벚꽃놀이를 즐기고, 초여름 밤에는 맥주 페스티벌을 즐기고, 겨울에는 롯폰기의 일루미네이션을 보고, 그렇게 정해진 로테이션을 즐기며 살아가면 족한 곳.

하지만 그런 것은 역시 내가 아니기에, 나는 도쿄를 떠나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일본 회사에서 여자들한테만 차를 내 가라고 시키는지 궁금하다. 왜 일본에서 여자들은 라멘집과 덮밥집에 혼자서 못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왜 몇 달 치 월세에 육박하는 시키킹과 레이킹을 내야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 왜 관공서와 은행의 일처리 시스템을 좀 더 효율화할 수 없는지 알고 싶다. 왜 도쿄 도민들이 매일 만원 전철에 고통 받으며 출근하고 있음에도 도쿄 교통국은 버스 노선을 증차하지 않는지 도통 납득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 노동자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없고, 바꿀 힘도 없고, 그러기는 커녕 내 불만을 표출할 언어적 능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내가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한테는 설명하기 어렵고 귀찮아서 ‘세금 비싸서요’라고 탈본의 이유를 둘러대지만, 근본적 이유는 이 상실감과 무력감이다.

워홀 생활을 돌아보면, 좋은 기억도 있지만 아쉬움이 훨씬 더 많이 남는다. 좀 더 즐기지 못하고 성급하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던 점,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뛰어들어서 피 본 기억들, 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놀지 못한 것(…) 등등. 제일 아쉬운 것은 온지 반 년만에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바람에, 가장 좋은 계절인 도쿄의 봄을 평일에 만끽하지 못했던 점. 다음 퇴사는 무조건 벚꽃 시즌에 맞춰서 할 것이다.

그래도 사실은
도쿄를 좋아했어

일러스트 이민

일본을 욕하고 또 욕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나는 도쿄라는 도시를 좋아한다. 진짜에요…. 이제껏 욕하는 얘기만 주구장창 적어놓고 마지막의 마지막에야 와서 이런 말 하기엔 부끄럽지만, 나카노中野의 왁자지껄한 뒷골목 술집들과, 진보초神保町의 담배 냄새 섞인 오래된 카페들과, 킨시쵸錦糸町에서 키요스미清澄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골목을 좋아한다. 비 내리는 긴자 거리와, 초여름 밤바람이 부는 신주쿠 뒷골목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도 가끔은 그리워할 시간들과 공간들이 생겼다. 그것에 감사하고 있다.

만일 2년 전의 나로 다시 돌아가 도쿄로 올 것인지 묻는다면, 의외로 한 번쯤은 다시 고민해볼 것 같다. 왕복 교통비 아끼겠다고 닛포리에서 이케부쿠로로 자전거로 한 시간 반을 왕복하던 그 때 내리막길에서 불던 산들바람이, 그때 듣던 ‘sekai no owari’의 노래가, 다시 나를 이 곳으로 꾀어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도쿄라면, 미친 척하고 한 번쯤은 다시 속아줘도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작가의 태만함으로 도중에 4컷 만화가 생겼다가 안 생겼다가 했던 불규칙한 연재에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해요. 그리고, 이제까지 읽어주셨던 독자분들 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고생 많으셨고 늘 행복하세요.

특히 독자분들 중 외노자 동지들이 계신다면 두 배로 사랑합니다. 그대의 앞길에 상여금과 상사복이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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