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탓이 아니다
JTBC 2부작 <안녕 드라큘라>는 방영 전부터 기대에 가득 찬 사람들의 목소리가 잇따랐다. 소녀시대 출신 서현과 배우 이청아가 연인관계로 나온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부터였다. 2015년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방영된 동성애 키스 장면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은 후 처음이었다. 초반에는 레즈비언 소재라는 데에만 집중 조명 받았지만, 차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보다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즈비언인 딸과 그것을 지켜보는 엄마와의 관계’였다.
드라마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세 관계를 보여준다. 저마다 다른 사정을 갖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모두 여자가 있다. 레즈비언인 딸, 이별 후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진 가난한 밴드 보컬, 동네가 재개발돼서 친구와 헤어지게 된 여자아이. 가장 외면하고 싶지만 미룰 수 없는 문제를 맞닥뜨릴 때, 세 여자는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가는지 각각의 성장기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김다예 PD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입봉작인 <안녕 드라큘라>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여성서사를 담은 작품을 꼭 하고 싶었어요. 주인공들이 조금씩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있거든요. 작게 보면 개인의 성장기이지만, 마음 속에 묻어둔 문제를 마주하는 과정에서 본인 탓이 아니라는 응원과 연대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어요." 이 인터뷰를 다 읽은 뒤, ‘본인 탓이 아니’라는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건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이라는 의미와 가깝기도 했다. 그래서 유난히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던, 안나의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드라큘라
초등학교 교사인 안나는 유명 드라마 작가로 활약하는 엄마 미영과 단 둘이 살고 있다. 시기별로 남자를 바꿔 만나는 미영을 보면 언짢지만 엄마가 왜 그러는지 직접 묻지 않는다. 한 공간에 살면서도 둘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미영은 안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안나는 정반대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거나 혹은 모르는 척 하는 엄마일 뿐이다. 안나에게는 8년을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았다. 일상을 유지하는 게 어렵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버겁다. 안나는 앓고 있다.
중학생 시절, 안나는 동성연애를 아웃팅 당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 사귀던 여자친구와 입을 맞추다 연인의 할머니에게 발각된 거다. 할머니는 두 여자아이를 교회로 데려가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어서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라고 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열심히 빌라고 했다. 안 그러면 먼 훗날 지옥에 갈 거라는 무서운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그때 달려온 여자, 미영이 소리질렀다. “할머니, 할머니나 지옥 가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안나는 차마 맺지 못한 말을 반복했다. 엄마, 나 지은이랑. 엄마, 나 지은이랑. 엄마, 나 지은이랑. 그리고 그 말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 미영이 먼저 말했다. “안나야, 엄마도 안나 나이 때 선도부 언니한테 편지도 쓰고 쫓아다니고 그랬어. 근데 그거 시간 지나면 그냥 다 지나가. 아직 안나가 어려서 그래. 너 옆집 남자애 좋아하고 그랬었잖아. 둘이 막 결혼한다고 그러고. 엄마는 하나도 걱정 안 해.”
미영을 보면서 나는 지극히 평범한 엄마를 떠올렸다. 자기 딸을 모독하면 그게 누구든 참을 수 없어 달려가 호되게 복수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내 편만은 아닌 거다. 우리는 오로지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이해 받는다. 엄마의 배경지식이 나의 정보가 되고, 엄마의 아량이 내게 주어진 자유의 크기가 되면서.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이해 받을 수 없는 날들이 늘어났다. 서로의 골이 점점 깊어갈 때, 안나가 말했다. “엄마는 날 필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안전하고 안전한 관속에 가두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억지로 웃기 시작한 게.” 그렇게 수많은 여자들이 드라큘라가 되었다.
대신하지 마세요
미영은 화장실 전등을 뚝딱뚝딱 고치는 안나를 뜯어말린다. 혼자 하게 되면 결국 혼자 살게 된다는 말과 함께. 이건 안나를 끝까지 품에 안고 살고 싶은 미영의 마음이기도 하다. 사랑은 변질되면 집착이 되고, 집착의 기저에는 불안이 있다. 미영이 모른 척 해왔던 것들이 오랜 시간 미영을 괴롭혔을 거다. 미치도록 불안하게. 그래서 그 불안은 무심하고 언짢은 몇 마디로 배설된다. “옷 왜 그거 또 입어? 피부는 왜 그러니? 야, 너 남자들이 피부를 얼마나 많이 보는데.” 안나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꼭 남자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안나의 연인이 안나의 물건을 소포로 돌려보냈을 때, 미영은 딸의 표정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실의에 빠진 딸의 모습을 차마 참지 못하고 안나가 모아둔 물건을 갖고 연인을 찾아가기도 했다. 현실 속에서도 딸을 위한다는 이유로 엄마가 할 일을 대신하는 일들을 종종 보곤 한다. 안 그래도 사회에서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집안에서조차 엄마가 그 기회를 박탈하고 유예시키는 셈이다. 그 딸이 소수자일경우, 그 유예기간은 더욱 길어진다.
이 맥락에서 비추어 보면 안나가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던 화장실 전등 갈기를 엄마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막았는지, 안나의 이별을 왜 자신이 종식시켜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딸로서 주어진 임무는 오로지 관 속에서 이빨을 감추고 있는 것, 그것 하나뿐인 것이다.
안나와 같은 모든 딸들에게
우리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통금을 부여했다. 딸은 믿지만 세상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했고 나는 계속해서 자유롭지 않았다. 처음엔 늦은 밤까지 유흥을 즐길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었다가, 시간이 지날 수록 내 인생의 선택권이 내가 아닌 엄마 손에 있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분노를 키워냈다. 결정도 후회도 만족도 모두 내 것이 아니었다.
미영과 안나 사이의 벽은 이렇게 사랑이라고 오해한 행동들 때문에 굳건해졌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엄마가 나의 결정권을 점유했던 순간들. 잃어버린 중요한 기회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많은 딸들이 익숙함을 느낄 것이다. 내가 직접 선택해 본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경험치’는 말 그대로 나의 판단이 쌓는 적립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던 시간을 끝내고 이제는 똑바로 응시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니까, 서로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을 수면 위로 올려서 깨끗하게 정리하자는 것이다. 엄마가 만든 안전한 관을 경험했던, 반쪽 짜리 평화를 유지해 본 모든 딸들에게 안나가 전한다. “드라큘라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드라큘라를 그대로 마주하는 법이다. 우리는 살면서 아마 또 다른 드라큘라를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비록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러므로 안녕, 나의 드라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