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의 몫인 것처럼
어렸을 적 나는 맞벌이 가정에서 자랐다. 엄마는 학습지 선생님으로 일했는데, 당시 여성 대부분이 부엌과 주방을 지키고 있었기에 아마 직업을 가진 것에 대해 지금보다 더 합리적인 혹은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가 없는 낮 동안 나를 봐준 건 4층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얼굴은 어렴풋하지만 20대 아들 셋이 있었고, 그 집에 키우던 잉어나 모형 컴퓨터 같은 장난감 따위가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결코 짧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4층 아줌마 댁은 엄마에게 그런 곳이었다.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매일의 고금리 빚이 차곡차곡 쌓이는 곳.
그러던 어느 날, 엄마랑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주제 없는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도 주변에서 애기 울음 소리가 나면 불안해져. 너 4층에 맡기고 여기저기 수업 다닐 때, 길에서 애기 울음 소리 들리면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막 울고 그랬다니까. 다른 집 애들 공부시키러 다니면서 우리 애기는 내가 제대로 봐 주지고 못 하는 것 같아서.”
KBS <회사 가기 싫어>는 ㈜한다스 안에서 직장인의 희로애락을 펼치는 모큐멘터리로, 첫 방영과 함께 직장인 층으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특히나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에 반발심을 가진 젊은 세대 직장인들의 호응이 가장 컸다. 회사가 집 다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만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고, 또 그곳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하고 부당한 일들의 굴레를 드러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지난 5월 7일, ‘슈퍼맘은 없다’ 편이 이어졌다. 12년 차 직장인이자 7년 차 엄마인 양선영 과장에 관한 이야기다.
양선영과
양선영 과장
이야기는 어느 휴게소에서 시작된다. 차에서 헐레벌떡 내린 양 과장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급히 마친다. 숙련된 속도를 보아하니 한두 번의 경험이 아닌 듯했다. 오늘따라 쌍둥이 아이 둘은 아팠고, 유치원에 보낼 수 없어 이른 아침부터 시댁인 천안까지 다녀온 것이다. 정신 없는 반차는 이동하는 것만으로 끝이나 무척 짧게만 느껴지는데, 아마도 그의 휴가는 이런 식으로 공중으로 흩어져 왔을 것이다.
회사에 돌아오고 나서도 영 매끄럽지가 않다. 아이를 맡기느라 쓴 반차 때문에 큰 프로젝트를 남동기인 박 과장에게 넘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무리하지 말아라, 이 일에 올인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등 양 과장을 배려한 척한 설득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상황이며 처지며 생각해서 해 주는 거니 고맙게 받아들이라는 말까지. 그리고 양 과장이 대답한다. “그렇게 못 하겠는데? 내 담당이고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왜 자꾸 넘기라고 해요? 저 반차 썼지만 일도 다 마무리 했고, 잘 마쳤어요. 그게 어떻게 고마운 거예요?”
실은 양선영 과장은 출중한 능력으로 수석 입학을 했고, 장장 11년을 성실하게 근속했다. 그런 그를 둘러싼 말들은 이런 것들이다. “일하느라 애 키우느라 힘들죠? 아, 아니다. 양 과장님 얘기 는 아니겠다. 오전에 반차 쓰느냐고 바쁠 텐데.”, “퇴근해. 천안에 애들 받으러 가야지. 가랄 때 가. 무슨 부귀영화 누리겠다고 저래.”, “일 욕심도 좋지만 그러다 남편이 딴 생각한다.” 양 과장은 자신 스스로를 빚쟁이라고 표현했다. 시어머니, 남편, 직장에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붙여 산다는 이유였다. 엄마도, 회사원도 아닌 채 어느 것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단다. 하지만 저 말들을 보니, 빚쟁이는 아닌 것 같다. 에이, 여기에 빚쟁이는 너무 심하지. 그보다는 ‘죄인’이 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유리 중 유리,
방탄유리
일하는 여성을 두고 하는 평가의 말들은 기혼자에게만 해당되지 않았다. M문고 다이어리 개발 책임자로 한다스 영업기획부 직원들과 협업하게 된 윤희수 과장은 트렌드 흐름을 잘 짚어낼 줄 알며 뛰어난 감각과 뚜렷한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 상사는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질문과 동시에 결혼은 해도 애는 낳지 말라는 조언을 건넨다. “너 그러다 경력단절녀 된다?"라며, 역시나 걱정 어린 척하는 말을 전하면서.
양선영 과장의 업무를 다른 이에게 넘기라고 지시하는 자리에 윤희수 과장도 있었다. 강백호 차장이 그만 프로젝트를 내어줄 것을 채근하려는 순간, 윤희수 과장은 그의 말꼬리를 잘라 버리고, 잘 부탁 드린다는 말로 매듭지었다. 양선영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윤희수였던 게 아니었을까. 독선처럼 비춰진 윤희수의 태도에 강백호는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에 양 과장은 버거운 사람이라고 말을 꺼낸다. 애기 때문이냐고 묻는 질문에 강백호는 한치에 망설임이 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혹시 저거 보이세요?” 윤희수가 위를 바라보며 한번 더 질문을 던졌고, 강백호는 심드렁하게 있을 뿐이다. “역시 강 차장님 눈에는 안 보이나 봐요. 내 눈에는 똑똑히 보이는데. 저기 있잖아요, 유리천장.”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2019년 발표한 유리천장지수에 의하면 OECD 29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은 최하위를 기록했다. 100점 만점 중 20점 남짓을 받았고, OECD 평균인 60점보다 훨씬 큰 격차를 두고 있다. 특히 여성 임금이 남성 임금에 비해 34.6%에 불과했고, 여성 관리자의 비율도 꼴찌를 기록했다. 강백호 차장에 보이지 않는다는 그 유리천장, 정말 안 보이는 걸까 아니면 안 보이는 척 하는 걸까?
없으면 없는 거다
<회사 가기 싫어>에서 윤희수와 양선영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은 참 닮았다, ‘역시 독해.’ 이상하다. 평범치를 넘어선 ‘슈퍼Super’는 엄마에게만 붙는데, 그 엄마에게 주어진 사내 직위며 직급은 조금도 슈퍼가 아닌 것이다. 혹시, 수 많은 역할을 짊어지게 하고 직접적인 보상 대신 이름으로 무마하려는 것은 아닐까. ‘엄마’는 계속해서 유지시키면서, 산업의 역군으로도 쓰려는 은밀한 계략으로.
어떤 여대에서 일명 띵문으로 내려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입사와 동시에 사내에 무조건 여성 카르텔을 생성하고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결속력 없이 여성 노동자의 입지와 처우를 쉽게 개선할 수 없기 때문이고, 남성은 결코 여성 노동자를 대변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가 길 위에서 아이 울음 소리를 듣고 주저 앉았을 때, 나를 지켜준 것은 누구였나. 아빠가 아닌, 4층 아주머니였다.
여성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조금 더 허술해지는 것이다. 사회의 수많은 제약에도 나는 거뜬하다는 능력을 일일이 검증해 보일 필요가 없다. 남성 노동자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성이 혼자의 육아를 얼마나 부담스러워하고 어려워하는지를 통해 오랜 시간 잘 증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슈퍼맘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는 거다. 우리도 ‘슈퍼’가 아니라 결핍과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보여주어야 한다. 양선영의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고, 육아 휴직을 내기로 결심을 했을 때 비로소 양 과장은 큰 결실을 맺었다. 수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 사이로 그녀의 선명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메웠다.
봤지? 이게 실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