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여집합, 고하늘
‘블랙독(Black dog)’은 그저 색이 검다는 이유로 검은 유기견 입양을 꺼리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 검은 털의 개가 흰 털의 개보다 입양이 어렵다고 하니, 태생적인 미움까지 만들어내는 선입견의 위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 블랙독이 있다.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어느 곳에서도 환영 받을 수 없는 검은 개, 고하늘이다.
tvN 월화드라마 <블랙독>의 주인공 하늘은 어려서부터 외로운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이렇다 할 친구가 없어 수학여행 버스 안에 홀로 자리를 잡고, 잘 따르던 김영하 선생도 버스 전복 사고에 신을 구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두고 어른들이 가장 먼저 건넨 건 다급한 변명이었다. 그가 정교사가 아닌 기간제 교사이기 때문에 희생에 대한 보상을 일절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진 게 많은 이들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 가진 게 많지 않은 이는 그마저도 잃게 되었다. 김 선생의 유가족이 오열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고하늘은 선생이 될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지난한 현실뿐이었다. 임용고시 경쟁률은 매년 치솟고, 합격하더라도 공석이 날 때까지 무기한으로 기다려야만 한다. 실제로 2020학년도 중등임용고시 국어과 경쟁률이 19:1로 나타났으니, 20명 중 한 명 꼴로 겨우 정교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번번히 임용고시에 낙방하는 교사 지망생들은 현실에 맞춰 눈을 조금씩 낮추고, 그렇게 고하늘도 대치고등학교의 기간제교사가 되었다. 게다가 그의 삼촌인 교무부장의 백으로 학교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무성해지면서 다른 기간제교사들로부터 따돌림까지 받게 되었다. 학교는 그를 받아줄 기미가 없는 걸까. 학교가 포용한 모든 것으로부터 고하늘이 제외되었다.
박성숙과 고하늘,
라미란과 서현진
진학부 박성숙 부장은 입시 정보, 학생들 성적, 수능 현황 등을 줄줄 꿰는 베테랑 선생이다. 학교 내 파벌과 정치 싸움보다는 오로지 아이들을 우선 순위에 두면서 무심한 사랑을 전한다. 탄탄한 경력과 정보력으로 학원가에서 러브콜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학교에서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며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그런 그는 여기저기서 미움을 독식한 하늘을 멀리서 바라본다. 약육강식이 뚜렷한 학교라는 정글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블랙독>이 첫 방영되었을 때 시청자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현실고증을 탄탄하게 반영했다는 것과 너무 현실적인 나머지 차마 보기 힘들다는 것. 드라마는 초반에 전반적으로 배경 음악을 깔지 않는다. 타자 소리, 전화벨 소리, 대화 소리 등이 날 것 그대로 들려오고 소음 뒤편에 짙게 깔린 적막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누군가 말한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여전히 사무실에 있는 것 같은 숨막힘’ 이라는 표현을 십분 공감하게 된다. 무거운 분위기는 고하늘의 마음을 대변한 걸까. 잔뜩 위축되어 짐을 싸는 그에게 박성순 부장이 한 마디 건넨다. “이쯤에서 관두는 것도 괜찮지 뭐. 다 떠나서 어쨌든 먼저 학생 포기하는 선생은 선생 자격 없는 거, 아니겠어요?”
어느덧 봄방학. 박성순은 진학부의 일을 위해 학교로 출근한다. 이른 오전부터 늦은 저녁까지 매일매일. 그리고 성순 뒤로 보이는 하늘. 고하늘은 방학 중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교무실에 출근한 거다. 하지만 출근 후 하늘의 정리된 책상을 본 순간,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는 박성순을 보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사실은 업무가 아니라 하늘을 위해 방학에도 학교에 나왔던 거다. 그가 정말로 포기했다면 학교에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때, 텅 빈 교실을 바라보며 홀로 울고 있는 고하늘을 멀리서 목격하게 된다.
신입 사원과 그의 성장을 도모하는 선배 역할로 이미 <미생>의 장그래와 오상식 차장이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되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블랙독>이 처음에 ‘학교판 <미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서현진과 라미란의 워맨스는 극의 무게와 변곡점을 자유자재로 이끌어갔고, 서로에게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지만 배려와 다감함이 잘 느껴졌다. 하늘에게 벌어지는 굴곡의 굽이굽이마다 성순이 함께한 덕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기간제 2년 차가 된 하늘에게 성순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 선생님도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여기서 1년만 더 버텨요. 내가 진학부에서 딱 버티고 있어줄 테니까.”
외로운 생활이 고역이었던 하늘에게 그동안 ‘버틴다’는 말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꿋꿋이 견디는 것, 악착같이 남아있는 것, 어떤 상황에도 맞서 내는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박성순이 건넨 그 말과 동시에 두 번째 의미가 생겨났다. 문제 상황이 생겨도 어긋나지 않도록 함께 자리잡는 것. 누군가를 지켜주는 것을 두고 ‘버팀목’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학교의 여자들
서현진과 라미란, 두 배우는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지만 대부분 익숙한 범주의 스펙트럼 안에 있었다. 서현진이 로맨스물의 사랑스러운 푼수역을 주로 맡았다면 라미란은 천연덕스럽고 재치 넘치는 기혼 여성으로 자주 등장했다. 대중은 이들을 언제나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방송국이 안전한 시청률에 만전을 기하는 동안 이름 모를 아쉬움이 그렇게 쌓여갔다. <블랙독>이 여-여 주인공 구조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한다. 라미란은 특유의 코믹 연기를 가미했지만 엄격하고 강단 있게 소신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고, 서현진은 논로맨스 플롯에서 다소 음울하고도 당찬, 성장형 캐릭터를 소화했다.
특히 박성순의 경우, 기존 남성 인물에게 익숙했던 장면들이 자주 나왔다. 교장이 교무부장을 맡아보는 게 어떻느냐는 일종의 승진 제안을 했을 때 그들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대학 입학사정관들과 인맥을 쌓기 위해 주량을 늘리고, 교사들을 호령하는 것도 모두 그였다. 학교는 박성순 절실히 필요로 했고, 박성순은 그 일만을 위해 몰두했다.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매일 술만 마시고 온다는 남편의 타박에 성순이 익숙하게 답한다. “내가 지금 밖에서 놀아?”
게다가 여성 조연들도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교무부장 공석을 두고 은밀하게 자기 피력을 하는 한재희 창체부장부터 정직원 등용을 시켜주지 않아 복수심에 타올랐던 송찬희 입학사정관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국대 의대를 꿈꾸는 진유라까지. 자기 자리에서 욕망을 키우고 그걸 드러내는 데에 서슴지 않고 떳떳하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학교에 있는, 학교로 가고 싶은 여자들이 떠오른다. 드라마의 현실성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 수록, 많은 이들이 ‘고하늘’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실제 <블랙독> 최종화가 방영된 날짜 기준, 이틀 뒤인 2월 7일이 2020년 중등임용고시 최종 발표라고 하니 극을 보던 이들의 불안이 커졌을 거다. 무수한 고난 앞에서 하늘이 그랬듯 포기하고 싶은 이들에게, 자신이 어쩐지 블랙독처럼 느껴지는 이들에게 하늘이 했던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이 어둠에 완전히 적응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