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언박싱 17. 일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스토브 리그> 이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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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언박싱 17. 일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스토브 리그> 이세영

이자연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직업인으로서의 이세영

야구의 비수기 겨울, 야구의 인기가 들끓었다. SBS 드라마 <스토브 리그> 덕분이다. ‘스토브 리그(Stove league)’란 프로 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때 선수들을 대상으로 계약 갱신이나 트레이드를 진행하는데, 난로(stove)를 둘러싼 팬들이 그 과정을 평가한다는 데서 비롯한 말이다. 보통 스포츠물이 오합지졸의 성장을 조명하듯, <스토브 리그>도 꼴찌를 도맡는 드림즈 팀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팬들의 눈물마저 마른 꼴찌팀과 새로 부임한 백승수(남궁민) 단장에게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주었고, 매 회를 거듭할 때마다 화제가 되었다.

<스토브 리그>가 최고시청률 19.1%의 성공을 거둘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야구에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브 리그>는 야구 선수와 경기가 아니라 프런트 (구단의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 중심의 플롯이다 보니, 스포츠 드라마 보다는 직업물 드라마에 가깝다. 그리고 그 안으로 한국 프로야구단의 유일한 여성 운영팀장, 이세영이 보였다. 그가 일을 하는 방식과 태도를 볼 수록, 직업인으로서의 이세영은 큰 영감을 주는 캐릭터다.

일러스트 이민 


주변을 둘러보는 마음

이세영은 동료애가 무척 커서 누군가를 온전히 편 들거나 적대하지 않고 그를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 먼저 나선다. 그렇게 무리에서 누군가 낙오되거나 배제되는 틈을 촘촘히 메워낸다. 반면 백승수는 좀처럼 속마음을 내비추는 일이 없다. 그는 결정권을 갖고 내밀한 전략을 짜는 자리에 있지만 그가 어떤 계획을 구상하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드림즈의 간판스타이자 4번 타자인 임동규 선수를 방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백승수를 향한 불만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곳곳에서 원성이 터져 나오고 그를 무시하는 말이 오갔다. 그때 이세영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단장님이 저희에게 허가 받고 하실 일은 아니니까요. 신임 단장은 단장 아닌가?”

이러한 행동들은 다른 직원은 물론 시청자들도 백승수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었다. 백승수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 있게끔 이세영이 질문을 건네거나, 질타를 한 덕분이다. 백승수뿐일까? 구단 내 직원들의 속사정과 과거사를 이세영의 눈으로 알 수 있었다. 극 중 인물들 간의 끈끈한 연결고리가 되면서 시청자를 위한 정보제공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동료가 전부인 순간들이 종종 있다. 귀를 빌려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견뎌내고 있는지 모른다. 세영이 동료를 생각하는 넓은 품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덕에 오늘을 마칠 수 있었을까? 모두의 무탈함 속에 세영이 있다.

굽히는 법이 없다

최초의 여성 운영팀장이자 최연소 운영팀장인 이세영. 그를 따라오는 수식어를 보면 이 자리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모진 풍파가 있었을지 눈에 선하다. 더구나 선수 출신을 선호하는 직군 특성을 대조해 보면, 그는 비 선수출신이자 극소수인 여성으로 우대조건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하지만 그는 예리함과 성실함으로 업무를 잘 수행해냈기에, 그를 무시하는 동료도 드물다.

이세영은 한창 선수들과 연봉 협상을 체결해야 하던 때, 모기업의 재정 지원이 현격하게 줄어 난항을 겪게 된다. 선수들이 원하는 연봉과 구단이 제시하는 금액의 차이가 몹시 크게 벌어졌고, 협상을 제때 마치지 못할 시 훈련을 제대로 돌입할 수 없는 문제와 구단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문제를 걱정해야만 했다. 그중 주전 포수인 서영주는 팀 내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선수로 유명하다. 본래 거칠고 쉽게 폭주하는 성격 때문에 매년 연봉 협상이 쉽지 않았던 것. 역시나 그는 자기가 있는 병원과 술집으로 새 단장을 불러내며 기싸움을 이어갔다.

기어이 단란 주점에서 이세영과 백승수를 불러 앉힌 그는 백승수의 무릎에 양주를 쏟는다. “이러면 (야구 때문에) 무릎에 물 차는 기분을 아시려나?” 예측할 수 없는 무례함이 폭주했다. 단번에 분위기는 냉각되었고, 세영이 그 컵을 빼앗아 벽면에 세차게 내던졌다. "야, 팀장. 너 지금 선 넘었어.” 라며 비꼬는 그에게 세영의 사자후가 이어진다. “선은 지금 네가 넘었어!”

서영주는 세영을 ‘야, 팀장', '여직원’과 같은 단어로 호명했다. 그럴 때마다 세영은 “여직원이 아니라 운영팀장입니다.” 라며 단호한 말로 정정했고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태도로 응수했다. 현실에서 많은 여성 직업인이 갖고 있는 말버릇이라는 ‘쿠션어’에 대해 들은 적 있다. 회사 생활에서 서신 상으로 연락을 나눌 때 기본적으로 ‘죄송하지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딱', '잠시', '그냥', '작은'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면서 의사전달을 축소시키는 말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습관을 줄이는 것만으로 원래 자신이 갖고 있는 재량만큼의 영향을 제대로 할 수 있고, 그 어떤 무례함도 자체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 이세영 운영팀장의 말에 당위성이 느껴졌던 건, 한번도 쿠션어를 찾아볼 수 없던 명확한 어투와 태도 덕분이었을 것이다.

애와 증 그 사이

무엇보다 이세영은 자기 일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다. 자신이 야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어린 날을 백승수 단장에게 전하고, 아침밥을 먹다가도 드림즈 뉴스를 보고 달려 나가고,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엄마와 나누는 이야기의 8할도 일에 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직속 후배인 한재희는 가구업체 회장의 손자로, 드림즈 첫 면접에 낙하산으로 들어왔는데 그를 복도로 끌고 가 멱살을 쥐었던 것도 세영이었다. “저기 너랑 같이 앉아 있던 사람들이 여기 왜 왔을까? 너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절실히 노력했는데 너 같은 놈이 한 자리 차지해서 떨어질 거 아니야. 낙하산 새끼야, 저기 사람들한테 사과하고 집에 가. 합격 안 되게 내가 만들 건데 혹시 만약에 합격하게 되면 너 오지마. 그럼 너 죽어.”

단순한 정의감과 불의를 못 참는 성격 때문이 아니라, 세영은 온전히 자신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섰다. 그게 대기업의 손자건, 회사의 결정이건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매 시즌 꼴찌를 도맡는 팀 안에서 패배감에 익숙해질 때면 주문처럼 스스로 먼저 포기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스리기도 했다. 백승수가 극의 주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동안, 세영은 그 옆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패기만 믿는 어리광도, 요령을 익혀 쉬운 길을 택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의 일을 열렬히 사랑하고 아끼는, 그래서 매 순간을 귀하게 여기는 성실한 직업인이다.

구단의 여자들

매너리즘의 숫자는 3의 배수로 표현하곤 한다. 3년 차, 6년 차, 9년 차. 이 때가 오면 여태껏 해온 일들에 지루함과 권태를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이에 많은 직업인들이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는 자기만의 기술과 자세를 고민하는데 이세영 운영팀장의 방식은 그 자체로 큰 자극을 주었다. 마치 새해 목표를 새롭게 다지던 순간과 비슷했다. 하지만 첫 화가 방영되고 나서 이세영을 둘러싼 반응은 크게 좋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실제로 야구 구단에 여성 운영팀장은 전무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나치게 극화됐다는 것이다.

드림즈 구단에도 여성 직원은 이세영을 제외하고 딱 한 명 더 있다. 바로 임미선 마케팅 팀장이다. 칼퇴를 사랑하고 가십거리와 커피 타임을 즐기는 탓에 백승수 단장의 눈밖에 났지만 그도 한 때 불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라운드 페인팅, 익사이팅 존, LED 보드 광고 등을 처음 시도하면서 마케팅 만으로 흑자 20억을 달성했던 열정 어린 시절들.

유일한 여성 직원인 이 둘을 보면서 현실에 없는 자리를 떠올렸다. 없어도 너무 없는 나머지, 드라마로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두 자리를 말이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할까. 조금 더 오래 남아있기 위해서, 여성 직업인의 생태계를 남성의 것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우리에게도 다음 리그를 위한 점검의 시간이 필요하다. 동료애를 장착하고, 강한 결단력을 다지고, 일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온전하게 집중하는 시간 말이다. 지치지 않는 것. 그것이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오늘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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