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함이 다가왔다면, 딱 200분 동안 당신이 배를 잡고 구르게 만들 즐거움이 있다.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한 <드라마월드>다.
*주의: 이 글은 <드라마월드> 스포일러 함량이 높습니다.*
남주, 여주, 김치 싸대기, 성공적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시청을 포기한 한국 드라마를 오히려 외국인들이 더 좋아하게 되어버리면서, K-팝에 이어 K-드라마는 또 하나의 유별난 서브컬쳐 장르로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외국인 덕후들이 뭉쳐서 한국 드라마만이 가진 뻔하디 뻔한 클리셰를 즐겁게 버무려 낸 드라마가 <드라마 월드> 되시겠다.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고 있는 가스파드 작가의 <전자오락수호대>를 즐겨 보던 사람이라면 <드라마월드>의 설정을 금세 이해할 수 있다.
게임 그래픽 뒤에 숨어서 게임의 진행을 총괄하는 게 사실은 '전자오락 수호대' 사람들이라는 가스파드의 만화처럼, 언제나 남녀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하며 마무리되는 한국 드라마는 사실 조력자들의 노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월드>의 설정이다.
하지만 이번 한국 드라마인 <사랑의 맛>에서는 16회가 완결인데 13화가 되도록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하지 못했다. 샌드위치 가게를 꾸리는 아빠와 함께 사는 ‘평범한 대학생’ 클레어는 이 상황에 속이 탄다. 어찌나 속이 타는지 가게에 들린 손님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면서도 이 커플의 답답함에 대해 성토할 지경이다.
‘평범’한 주인공, 드라마월드에 입성
자신의 삶은 기필코 평범하다고 말하는 클레어의 삶은 사실 평범하지 않다. 엄마가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한 이후 아버지의 성격은 180도 바뀌었고, 엄마의 죽음 이후에 남은 둘이 함께 즐거울 일도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클레어는 어딘가 풀이 죽어 있고, 어딘가 모르게 소심하며, 어딘가 모르게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사람이 되었다. 클레어가 한국 드라마의 세계에 하릴없이 빠져들게 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보장되어 있는 행복한 결말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것이다.
슬금슬금 이상한 균열이 일고 있는 <사랑의 맛>을 애청하던 클레어는 우연히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성공한 오타쿠라면 누구나 꿈꾸는 판타지의 일원이 된다. 바로 자신이 좋아해 마지않는 세계의 일원이 되는 것. 게다가 미션까지 주어졌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세계를 앞으로 남은 네 개의 에피소드 안에서 구해내는 것. 일종의 영웅 서사시 서사가 곁들여지면서, 한 회에 고작 20분에 열 편 뿐인 시트콤은 제법 긴장감을 갖추게 된다.
운명같은 사랑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그림 같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빠지는 사랑도 아니고, 오랜 시간의 애정을 쌓은 끝에 자연스러운 결말이 찾아오는 사랑도 아니고, 한국 드라마답게 어느날 불벼락처럼 떨어져서 완성되는 사랑이기에 그렇다. 어떤 ‘수’를 쓰지 않고서는, 클레어는 조력자의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그만큼 한국형 드라마에서 양산되는 사랑은 부자연스럽고 가식적이다. 그 가식을 덮기 위해 극적인 사건들의 출현 빈도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남주인공의 식당에 불을 지른다거나, 남주인공이 화살을 맞을 뻔 한 캐릭터를 구해낸다거나 하는 등의 클레어가 만들어내는 극적인 소동들처럼 말이다.
이처럼 <드라마월드>는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는 괴상한 요소와 한국적 정서의 클리셰를 투명하게 재연한다. 그 재연이 지나치게 정확하기에 드라마를 보는 한국인은 자신의 문화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메이크업을 해야만 당신은 여주인공임을
클레어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매뉴얼을 몇 번이고 읽지만, 매뉴얼이 그를 결코 좋은 조력자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의로 행한 몇몇 일들과 이로 인해 벌어진 사건 때문에 클레어는 점점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되는 조력자에서 자꾸만 카메라에 밟히는 ‘사랑스런’ 조연이 된다. 급기야는,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려는 신호가 곳곳에 등장한다.
갑자기 이상한 배경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남자 주인공의 눈빛이 그윽해 지고, 클레어가 혼자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데 남자 주인공이 찾아오는 등 미치도록 웃긴 ‘사랑에 빠지는 사인’은 많지만 한국 여성으로써 이 드라마를 보며 숙연해진 때는 클레어가 정말로 ‘여주인공이 될 때’였다. 여느 로드샵 화장품 브랜드의 협찬을 받은 것이 명확한 장면은 클레어가 조력자일 때는 하지 않았던 ‘한국형 메이크업’을 받을 때 등장한다. 적당히 그린 듯 안 그린 듯한 아이라인, 하얗고 윤이 나는 피부 표현, 그리고 살짝 핑크빛이 도는 립.
남자 주인공 박준과 술을 먹은 이후부터 클레어가 지속적으로 착용하는 메이크업은 ‘아름다운 한국 여성’식의 메이크업이다. 그 메이크업은 클레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살리거나, 장점을 극대화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한국식 여주인공 메이크업의 목적은 여성을 가녀리고 참한 인상의 분홍빛 소녀-여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클레어는 드라마월드에 속한 캐릭터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조력자였지만, 메이크업을 받은 이후로는 결국 박준과 사랑에 빠져 진정한 사랑의 키스를 함으로써 드라마월드를 구했다. 그 결말은 아무리 <드라마월드>가 시트콤이라 해도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클레어는 자신의 역할과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구해낸 영웅이 아니라,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캐릭터 붕괴, 이른바 ‘캐붕’에 빠진 원더우먼을 보는 팬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악녀 조연은 멍청해야만 함을
한편 <드라마월드>의 세계에서 만년 악녀 역할을 맡아 온 가인의 캐릭터는 <드라마월드> 에서 가장 단조롭다. 가인은 아름답다. 또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우수한 교육을 받았으며, 기업의 회계와 경영을 도맡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목표는 남주인공의 사랑을 얻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얻어야만 하는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인은 지나치게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의 악녀이지만, 요즘 한국 드라마의 악녀들은 어떤 이유도 없이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던 과거에서는 이미 벗어난 지 오래다.
가인은 박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조력자이지만 최종 빌런이 된 세스와 협력한다. 아니, 사실은 세스에게 이용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가인은 드라마월드에서 이번에 세운 <사랑의 맛> 프로덕션 안에서도, 그 프로덕션 밖에서도 꾸준히 집착에 사로잡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휘둘린다. 세스는 그를 이용할 대로 이용한 후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그를 재빨리 살해하지만, 다른 주인공들에게 가인의 죽음은 그저 ‘무언가를 어떻게 해 볼 기회’다. 클레어에게 가인의 죽음은 박준을 다시 서연과 엮을 찬스이고, 서연을 짝사랑하는 꽃집남에게는 상심한 서연을 위로해 자신 옆에 붙잡아 둘 찬스다.
가인은 캐릭터 설정 상 분명히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지속적으로 ‘멍청했다’. 그리고 악녀라고 주장하는 스스로와는 다르게 ‘순진했다’. 가인은 <사랑의 맛>에서도, <드라마월드>에서도 가장 도구적인 캐릭터로밖에 남지 못했다. 가인은 보통의 한국 드라마가 ‘악한 여성’에게 주는 좁은 운신의 폭을 보여준다. 가인의 행동 방식, 그리고 결말은 여주인공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주인공과 영 사랑에 빠지지 않고, 조력자의 부자연스러운 조력을 거부하고 결국 자신이 선택한 조연 남자 주인공과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서연과 대비된다.
이것은 뒤틀린 한국의 얼굴이다
<드라마월드>의 제작진이 한국 드라마에 단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한국 드라마라는 특이점이 온 대중문화 콘텐츠를 유머와 풍자의 선으로 끌어 올린 것은 확실하다.
<드라마월드>의 줄거리는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통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지나친 부작위와 우연은 모두 ‘한국 드라마라면 가능해’의 정서로 충분히 커버된다.
또한, 드라마는 김치싸대기와 같은 명장면을 리플레이하고, 양동근이 나와서 조선시대 랩을 선보일 뿐만 아니라 매 회 끝날 때마다 카페베네식의 아스라한 마무리와 애절한 OST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나오는 미쟝센까지 똑같이 복제하는 센스를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장치들은 한국 드라마에 익숙한 한국인과 덕후에게 쉴 새 없는 웃음을 선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드라마월드>는 한국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한국적인 정서의 특이점’을 뭉뚱그리거나 미화하지 않았다. 영어를 섞어 쓰는 주인공들이 재연하는 한국인의 정서라는 것은 어색하고 불편하다.
꿋꿋하게 아버지-회장님의 가업을 이어 받을 것을 강요하는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 남자 주인공의 집에 멋대로 들어와서 당당히 앉아 있는 어머니, 결혼할 상대는 당연히 내가 골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폭력적인 방식으로 서연을 위협하는 세스, 하지만 세스에 못지 않게 여성에게 무의식적으로 폭력적인 남자 주인공 박준. 그는 여자 주인공의 손목을 낚아채고, 여성 등장인물들에게 거리낌없이 소리를 지르며 이성을 잃은 듯 화를 낸다.
<드라마월드>는 한국 드라마의 뒤틀린 면까지 모두 재현하면서, 이 드라마를 볼 지도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되묻고 있다. “어이, 한국인들. 정말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클리셰들이 당신들의 자랑스러운 대중문화인가?” 기생을 끼고 현감 차림으로 랩을 하는 양동근과 김치싸대기로 얻어맞는 여주인공을 보면서 깔깔대며 웃다가도 잠시 웃음을 멈출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질문 때문일 것이다.
Viki가 제작한 <드라마월드>는 현재 시즌 1까지 공개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