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올해 내가 열렬히 사랑한 페미니스트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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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올해 내가 열렬히 사랑한 페미니스트 서사

오혜진

완벽하지 않으나
치열하게 거부하는

바야흐로 ‘올해의 ○○’ 계절이다. 유수의 명망인과 기관들이 올해 발표된 문화예술 콘텐츠 ‘BEST ××’을 발표한다. 당연히 불만은 있다. 어떤 텍스트가 감동을 만들어내는 순간은 온전히 텍스트 그 자체의 힘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그 힘의 절반은 그것을 접하는 향유자의 상황과 맥락에 기대 있다. 그러니 나와 어떤 접점도 갖지 않은 텍스트들이 제아무리 권위 있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꾼 ○○’라고 제시된대도 내게 큰 의미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목록’이란 그런 것이다. 만인의 미적・정치적 취향과 이상을 만족시키는 작품이 있을 리 없고, 올해 발표된 텍스트들을 모조리 섭렵한 사람이 있을 리 없기에 모든 목록은 불완전하다. 최근 여성서사에 대해 강의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들 중 하나는 ‘가부장제의 장력에서 자유로운 여성서사’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헌데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좋은 예술작품은 흠결 없는 이상태로서 제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이상화’에 거부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차라리 되묻고 싶다. 누군가가 보기에 ‘완벽한’ 예술작품이 있다 한들 그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이겠느냐고. 이미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나. 누가 여성인지, 무엇이 가장 페미니즘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논쟁과 경합의 대상으로 삼아온 시간이야말로 페미니즘 비평의 역사였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뽑은 최고의 작품만을 선별해 수용하기보다는, 페미니즘 서사를 사유하기 위한 자신만의 기준을 고안하고 그것을 공중에 설득해내는 과정이야말로 페미니즘 문화비평에 가장 부합하는 것 아닐까. 그 판단의 기준과 자격을 나 아닌 누군가에게 양도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페미니스트의 삶이자 자존심이다. 

아래 목록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올해 음미한 책, 영화, 공연, 드라마들 중 내게 가장 짜릿한 지적・정서적 쾌감을 준 사례들을 주관적으로 떠올려본 것이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문제적’으로 아름다워서 올해 나는 이 작품들을 열렬히 사랑했다(물론 내 머리맡에는 여전히 채 들춰보지 못한 수많은 잠정적인 ‘올해의’ 책과 영화들이 즐비하다). 

올해의 영화: 120bpm

‘올해의 영화’라면 내게는 단연 올봄에 본 영화 <120bpm>(로빈 캉필로)이다. <마담B>(윤재호), <Goodbye my love NK>(김소영), <공동정범>(김일란・이혁상)이 그 영화들의 탁월함을 설명하기 위한 수십 페이지의 지면을 탐내게 하는 영화라면, <120bpm>은 어차피 내게 책 한 권 분량의 지면이 주어진대도 그 영화를 ‘설명’하려는 내 기획은 끝내 실패하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 영화다. 

<120 BPM> 포스터.

1989년, 에이즈의 확산에도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정부와 제약회사에 대항하는 운동단체 ‘액트업 파리’의 활동가들을 조명한 <120bpm>의 대사와 미장센은 그간 내가 본 모든 영화들 중 단연 아름다웠다. 무엇이 가장 ‘급진적’으로 윤리적이고 민주적인지를 질문하는 전략회의에서 오가는 활동가들의 날선 논쟁과 눈빛은 그 어떤 극적인 스펙터클보다 강렬했고 스릴 넘쳤다. 분열하는 세포 같기도, 명멸하는 클럽 조명 같기도 한 입자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이 영화의 시각적 이미저리가 곧 자신의 죽음이 센 강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치열한 ‘정치장례’ 시위가 되길 바란 액트업 활동가들의 사그라들지 않는 의지임을 말하기 위해 이 영화는 관객의 심미적 역량을 자비 없이 소환한다. 기약 없는 공포에 맞설 방법은 오직 사랑과 용기를 바탕으로 한 투쟁이란 걸, ‘사랑을 위한 정치’이자 ‘가장 정치적인 사랑’, 그 불가결성을 온 존재로 말하는 게 곧 ‘퀴어’라는 걸 이 영화보다 절실하고 아름답게 가르쳐준 영화를 나는 알지 못한다. 

올해의 드라마: 마더

‘올해의 드라마’라면, 내 마음속에서 그 어떤 후보들의 도전도 허락하지 않은 채 독보적인 위상을 점한 tvN 드라마 <마더>를 꼽겠다. 

이미 영화 <비밀은 없다>・<아가씨> 등을 통해 차갑게 목가적인 여자들의 세계에 대한 특유의 상상력을 선보인 정서경 작가지만, 나는 그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마더>를 특히 편애한다. 학대 받는 여자아이를 구출해 딸 삼는 한 조류학자가, 사실 그 자신이 바로 강렬한 모성적 카리스마를 뽐내는 연극배우의 입양 딸이었다는 다소 낭만적인 구도에서 작가는 우리가 ‘자연적인 것’이라고 상상하는 모성에 대한 신화를 가장 시적으로 허무는 방법을 안다. ‘작위성’이 곧 ‘진정성’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영신(이혜영 분)의 연극적인 대사와 수진(이보영 분)이 감행하는 영웅적인 ‘납치극’에서 ‘엄마-되기’야말로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실현되는 것임이 설득될 때, 나는 TV 앞에서 그 어느 때에도 감각해본 적 없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올해의 공연:
불만폭주 라디오,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올해 본 공연 중 극단 ‘춤추는허리’의 <불만폭주 라디오>와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의 여운이 왜 그리 길게 남았는지 설명하기는 힘들다. 전자가 흔히 관객이 무대 위에서 목격하리라고 기대되는 대사와 동작의 속도와 반경을 배반하며 오묘한 정적과 예상치 못한 (반)동작으로, ‘한국에서 여성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비전형적인 정동의 드라마를 펼쳐낸다면, 후자는 몇날 며칠을 새도 부족하다는 듯 다변과 요설, 치고 빠지는 개그로 ‘가난한 여성 연극인이자 레즈비언, 번역가이자 채식주의자’로서 혼자 살아가는 일에 수반되는 페이소스를 뿜어낸다. 

“결국 저는 비장애인의 공연을 그럴 듯하게 흉내 내는 그런 공연만을 해왔던 걸까요?”라고 그 자신과 관객에게 반문하는 배우 서지원의 성찰과, “저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것 같고 나한테 요청을 했는데, 내가 못 돌봐줬을 때 그런 꿈을 꿔. 누가 나 때문에 그런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배우 이리의 대사가 그저 ‘소수자’의 역할을 떠맡은 이들의 처연한 독백이 아니라 이 ‘사회’라는 극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도발적인 고발로 들렸을 때, 나는 어쩐지 조금 부끄럽고 크게 위로 받았다.

올해의 책:
여름, 스피드,
BL 진화론,
정정헌

올해 읽은 책과 글들 중 ‘최고’를 뽑는 일은 가혹하다. 올해 내가 친구에게 혹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한 책은 아마도 한국 문단사상 가장 획기적인 게이종족지를 선보인 김봉곤의 소설집 <여름, 스피드>와 BL문화 공동체를 ‘여자들의 시장’을 현현케 한 실험적인 장소로서 급진적으로 분석한 미조구치 아키코의 <BL진화론>일 것이다. 

‘퀴어도 인간이다’라는 퀴어활동가들의 구호가 간과하는 ‘인간에 대한 규범적 인식’을 성찰한 시우의 「퀴어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문화과학> 93호)와, 오늘날의 난민혐오가 ‘촛불정권 이후 국민특권주의에 배태된 신인종주의’임을 날카롭게 가르쳐준 김현미의 「난민 포비아와 한국 정치적 정동의 시간성」(<황해문화> 101)도 올해 만난 가장 깊이 있는 인문학적 통찰이었다. 

<정정헌> 제 40호 표지.

하지만 단 한 권의 책만 언급해야 한다면 내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성균관대 여성주의 교지 편집위원회가 특별판으로 기획한 <정정헌> 제40호다. 편집위원들은 이 잡지의 과월호를 모조리 독파한 후, 이 잡지를 만든 1970~2000년대 선배들을 찾아내 인터뷰하는 대대적인 기획을 감행했다. 2018년의 편집위원회는 선배들에게 거의 절규하다시피 물었다. “여성주의 교지는 여전히 필요할까요? <정정헌>이 사라진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 60대에 이른 한 선배는 “왜 중간에 없어졌는데 또 다시 만들 생각을 했을꼬?”라며 의문을 제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선배는 “대학 내에서 열 명 중에 두 명이라도 성차별을 느낀다면 정정헌의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라고 답했다. 이 대답들의 온도차가 곧 학내 여성주의 교지 역사의 질곡을 드러낸다.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총여학생회 폐지가 정당화되는 이 난세에, 여성주의 시각의 비판적 시민권을 담지해온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근거를 기어이 찾고 싶었던 이들의 분투. 그 날카롭고 용맹한 실천을 무한히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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