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만에 다시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다. 내 체력은 늘 성과 없이 바닥을 치는데 MB는 오랜 시간 테니스로 단련된 건강을 자랑하며 천수를 누린다니 왠지 억울해져 시작한 운동이다. 오전 9시 동네 체육관에 들어서면 기묘한 활기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수십여 명의 중년・노년 여성들이 벌거벗은 채 샤워장을 활보하며 왁자지껄 수다 떠는 풍경은 ‘한국 여성대중 민족지 연구는 필경 예서부터 시작해야 하리라’라는 확신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더욱 낯선 것은, 한없이 자유로운 그 중년여성의 몸들은 물론 내 몸조차 무람없이 쳐다보지 못하는 나 자신의 갈 곳 잃은 시선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중 목욕탕이나 수영장 가길 꺼렸는데, 내 몸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도 싫지만 벌거벗은 타인의 몸을 보는 일도 꽤 계면쩍었기 때문이다. 몸과 성(애)에 대한 한국사회의 보수적 관념, ‘예쁘고 늘씬한 몸’에 대한 강박을 내면화한 결과겠다.
다 다른 몸,
다 다른 사연,
다 다른 자국
하지만 페미니스트 인문학자 김영옥의 통찰에 의하면, 무언가를 응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인식과 담론의 부재를 유도한다. 그래서 수영장에 갈 때마다 틈틈이 살폈다. 과연 서로 다른 세대적・직업적・가족적・지역적・문화적 배경을 지녔을 수십여 개의 여성-몸들은 다 다르게 생겼다. 유심히 보니 그 몸들의 늘어진 살과 주름들이 비로소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장소로 인지됐다. 허나 그 몸들은 하나같이 가장 깊은 주름 두 개씩을 비슷한 위치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가슴께와 등, 아랫배 근처에 마치 문신처럼 새겨진 그 ‘자국’들은 한국 여성들이 매일 착용하는 속옷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여성의 몸을 옥죄어왔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탈-코르셋’ 운동이 여성의 ‘공통성’에 근거한 절실한 기획인 것도 새삼 실감됐다.
그러나 내 당혹감은 무수한 여성-몸들의 공통성을 확인한 데에만 있지 않았다. 내가 카운터에서 다음 달 수영강좌 등록을 문의하자, 접수자는 즉각 신분증을 요구했다. 신분증을 내밀자 1초 만에 돌아온 대답은 놀랍게도, “가임 여성이네. 할인해줄게요.”였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일단 나는, 내가 오랜 기간 열과 성을 다해 축적한 지력도 매력도 체력도 정신력도 아닌 ‘임신력/출산력’으로 식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국가에서 ‘가임기 여성 지도’라는 해괴한 걸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의 고유성이 소거된 채 ‘가임 여성’으로 호명돼본 건 처음이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가임 여성’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지면에서 나의 임신 경력 유무를 밝힐 필요는 없겠으나, 내가 불임일 경우 저 일방적인 진단은 분명 내게 큰 무례이리라.
나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내 몸(의 상태)에 대해 저토록 일방적인 판별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신분증에 적힌 출생년도와 ‘2’라는 숫자가 나를 ‘가임 여성’으로 식별하게 한 근거/장치일 텐데, 그 숫자들은 나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안다. 각 지역 체육시설에서 실시하는 ‘가임 여성 할인’이라는 제도는 여성의 생리기간을 배려한 여성복지정책의 일환이며, 그건 오랜 기간 전개된 여성운동이 2000년대 중후반 획득한 소중한 성과임을. 하지만 꼭 이런 방식이어야 했을까.
최근 디지털성폭력 근절을 주장하는 집회 홍보 그림 중 괴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 웹툰은 “시위구역 내부에 트젠 의심(트랜스젠더로 의심되는 사람)”은 “신고”하라고 당부하며, 긴 머리에 긴 속눈썹을 지닌, 비키니를 입은, 그러나 아랫도리가 불룩한 사람을 그려놓았다. 그 사람을 괴이하게 본 시위자는 “뭐야 저 혼종…”이라고 중얼거리며 “신고게시판”을 찾는다.
이 그림은 가시화된 몸(의 일부)에 근거해 누군가의 성정체성을 한 눈에 식별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오만은 오랜 기간 인류를 구속해온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여성운동의 비전에 역행한다. ‘여성은 이러이러한 외모를 가져야 한다’라는 ‘여성(성)에 대한 규범적 인식’에 저항하고자 ‘탈코르셋 운동’까지 감행하는 여성운동이, 바로 그 규범적인 ‘여성(성)의 몸’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디지털성폭력 근절’이라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그 어느 누구에게도 구체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은 동료를 “신고”하라고 한다. 이것은 운동인가, 반동인가. 자신을 “혼종” 아닌 “순종” 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이때 “순종”이라는 것은 누구의 기준으로 재단된 것인가.
혼종과 순종
트랜스정치학 연구자 루인은 “몸이란 언제나 나의 해석과 타인의 해석이 실시간으로 경합하는 장이며, 그 해석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 긴장, 틈새, 오해, 혐오, 고통 등이 그 장을 이루는 중요 요소”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궁극적으로 맞서야 할 것은 “내 몸이 이 사회에서 배치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이는 비단 트랜스젠더의 경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밝혔듯,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나 역시 내 몸의 ‘여성적’ 특징들이 언제나 내게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내 몸이 ‘임신 가능성’을 체화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탐구의 대상이다.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또 다른 숙고를 요하는 작업이다.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반드시 몸에 대한 가부장적 규범만 문제인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한 나 자신의 주관적인 긴장과 갈등 또한 정당한 질문과 탐구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 것 또한 ‘페미니즘’이었다는 점이다.
그레나다 이민자 출신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는 “단결해야 한다는 말을 동질적이어야 한다”라는 말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자매애’라는 말로 아우를 수 있는 동질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단결이란, 원래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던 다양한 요소가 결합한다”는 뜻이며, “공통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면 다양성 내부의 긴장을 끈질기게 살피며 유지해야 한다.”는 것.
혜화역시위 참가자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성님”이라는 다정한 호칭이 ‘당신이 나와 같은 모양의 생식기를 가졌다는 (확인되지 않은) 믿음’에 바치는 헌사에 불과하다면 참 쓸쓸한 일이다. ‘여성’이라는 범주를 구성하는 공통성과 차이를 지혜롭게 조율하며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가능성을 고민하는 이들, 누군가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규범적인 인식을 통해 식별 가능한 대상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자원’으로 삼는 일에 저항하는 이들, “성님”은 바로 그런 이들에게 보내는 존중과 연대의 이름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