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당신을 지킬 의무가 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의 속편을 준비하던 때 적었던 첫번째 소제목이다. 2016년 말쯤 계획했던 속편 출간은 유야무야 무산되었으나 그 때부터 지금껏 나는 어쩐지 무산되었던 속편을 끊임없이 입으로 읊으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언니, 그의 친구, 온라인으로 연결된 여성, 인터뷰를 위해 만난 여성, 강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나를 잠시 불러 세운 여성, 학교에서 만난 동료, 동료의 동생까지 수없이 많은 여성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해야 했고 그 때마다 내가 동일한 간절함을 담아 건네는 첫 마디는 언제나 같았다. 네게는 너를 지킬 의무가 있어.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불법촬영 규탄 시위까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무서운 기세로 몰아 닥쳤고 따라가기도 벅찰 만큼 많은 의제가 빠른 간격으로 떠올랐다. 어제의 화제가 오늘의 뒤처진 이야기가 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속편의 첫 번째 소제목으로 준비한 문장이자 대화를 여는 첫 마디만은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낡아가기는커녕 나날이 성성해진다. 그제야 생각했다. 이럴 거면 진작 속편을 쓸 걸 그랬다고. 그러니 이제라도 그 동안 사적인 장에서 하고 다녔던 말을 글로 옮겨 두기로 한다.
어쩐지 전부 같은 고통
생각해 보면 페미니스트로서 공적인 장에 처음 등장한 계기도 그랬다. 강남역 살인사건이라는 분수령을 지나며 살면서 개별적으로 관계 맺은 여성들이 어쩐지 전부 같은 고통을 안았고, 그 규모가 내 한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고, 그러다 보니 나와 관계 맺은 적 없는 낯 모를 여성들의 얼굴까지도 죄다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말로 하다가는 도무지 답이 없다고 판단한 그 시점에, 한 명이라도 더 들릴 수 있는 곳을 찾아 맨발로 뛰쳐 나와 버렸더랬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에서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감상은 그래서 괜한 게 아니다.
이번에 나는 낯익기 때문에 감지하지 못했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에 대해 말할 것이다. 특히나 관계를 두고 분투하는 여성들에게 말을 건넬 것이다. 여성들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면서도 끈질기게 희망해서, 타인과 나 중에 자신을 저버리는 일이 가장 쉬워서, 자신이 목격한 것을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모르면서도 알아서 친밀한 이와 벌이는 분투에 자신을 던져 넣는다. 이들은 관계를 두고 고되게 노력하므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제 자리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이들을 어디로든 이동하게 만들고 싶다. 움직이지 않음/움직일 수 없음은 위험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현실이라는 친숙한 영역에 대해 말하는 동시에 삶 바깥이라는 낯선 영역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다. 현실과 결별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디딜 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복된 경험으로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공통으로 앓고 있는 문제다.
가부장제는 공고하다. 제도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삶은 그 영향권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공고한 제도가 사라지지 않는 한 나의 삶이 달라질 여지가 없다는 뜻과는 다르다. 공고한 제도가 철폐되는 순간과 우리 각자의 삶이 끝나는 순간 중 무엇이 먼저 올까. 나는 나의 일상이, 내가 맺는 관계가 깃들어 있던 폭력과 억압을 빠져나왔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이 생각보다 쉽게 가능하다.
우리에겐
우리를 지킬
의무가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킬 의무가 있다. 가부장제의 바깥을 상상하고, 발견하고, 그리로 이동하는 일만이 우리를 지킨다. 나는 사는 동안 최대한 많은 여성들을 구하고 싶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력감과 절망감에 삶을 저버리는 순간들을 줄이고 싶다. 무척이나 다행스럽게도 오랜 시간 선명하게 남아 있던 나의 첫 문장은, 혹은 첫 마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페미니즘 담론의 현재와 궤를 같이 하는 중이다. 이제부터 시작할 글이 공명할 여지를 가진 삶들에 최대한으로 가 닿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