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를 버리고 나를 고르기

생각하다데이트 폭력

‘그래도’를 버리고 나를 고르기

이민경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나는 이 연재에서 꾸준히 친밀한 관계에 깃든 위험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나 자신의 과거를 포함하여, 여성이 삶에서 마주하는 위험 중에 친밀한 관계가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여성들이 많은 경우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를, 혹은 관계 자체를 자기 자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들은 관계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홀로 고민하고 타인과 상담하고 상대에게 따진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 가장 쉽기 때문에 이들이 보이는 많은 움직임은 고정된 관계 안에서 자신의 마음이 잡은 자리를 바꾸어 낼 때 이루어진다. 문제가 많다는 것을 내심 알면서도 이 관계를 도저히 잃고 싶지 않아 백방으로 노력하는 여성들에게, 나는 가끔 상대와 자신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누구를 고르겠냐고 물어보곤 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적지 않은 여성들은 갈등을 한 끝에 모르겠다고 답한다. 

중요하지 않아서,
불편해서,
불안해져서

사실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노골적인 질문 앞에서, 실제 결정의 순간으로 다가오지 않은 단순한 가정에 불과한 이 물음 앞에서도 그렇게 답하는데 훨씬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현실에서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 내리며 살아가는 것일까. 자신에게조차 선택되지 못하는 여성들을 떠올리면 눈 앞이 아득해진다. 여성들은 대체 왜 이럴까. 사실은 답을 알고 있다. 자신에게 자신이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상대를 고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생각만으로도 불편해서, 상대를 잃는 순간 자신의 삶이 끝나 버릴 것만 같이 불안해져서.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차라리 강력한 한 방이 있었으면 좋겠어.’ 자신과 상대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답할 수 없다면서 갈등하는, 그러면서도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던 여성들은 때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깨고 나올 수 없는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할, 갈등할 여지가 없는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관계의 종식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방이 일어난 뒤에는 이미 여성이 내리는 결정이 쓸모 없어진다. 심하게 다치거나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렇게 바라는 이들에게 갈등의 여지가 없는 순간은 이미 왔다. 우리가 항상 더 이상의 어떤 결정도 쓸모 없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순간들을 ‘한 방’으로 취급해 주지 않았을 뿐.

'그래도'

앞선 칼럼에서 했던,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말은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사가 아니다. 수많은 선택을 자발적으로 하면서 유지되는 관계에서, 그것만은 결코 선택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과 상대의 관점이 충돌하는 순간에 상대는 상대의 관점을 견지하고 자신도 상대의 관점으로 달려가서 결국 자신의 관점이 기입되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는 광경을 많이 보았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말을 포기할 수 없을수록 더더욱, 내려놓을 수 없는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을 두고 ‘그래도’로 시작하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해 가며 참작해 주는 일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래도’란 보통, 사실은 용납할 수 없는 사건들을 겪고서 혼자서 두 명분의 감정노동을 하면서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의 신호탄과도 같다. 콘돔을 끼지 않겠다고 졸랐지만 그래도 사랑하니까, 언짢은 일에 입을 다물어 버려서 이유를 알아내어 기분을 풀어주어야 하지만 그래도 미성숙해서 그랬던 거니까, 말한 것을 또다시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그래도 변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기는 하니까. 

나는 관계를 끝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유지하려 붙드는 안간힘을 잠시 빼고 보자. 상대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며 전과 다른 변화를 향해 가는 이 감정노동의 이면은 스스로에 대한 착취를 방조하고 용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모두, 나의 착취에 가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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