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고 한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끝까지 무덤덤한 모습이 또 한 번 원망스러웠다. 다정했던 순간의 산산조각들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칼날처럼 예리해서 살점이라도 베일 것 같았고, 함께 만든 기억에 혼자만 소스라치는 것도 비참했다. 도망치듯 집에 돌아와 내리 다섯 시간을 울었다. 생각해보니 이건 슬픔이 아니었다. 술을 진탕 먹은 다음 날, 닭갈비를 먹다 얹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명치에 뭐가 걸린 것처럼 갑갑했다. 그래, 메스꺼움이었다. 내 지난날이 불쌍해서 토할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로부터 빼내어 분리하고 싶었다. 뺨을 한 대 치고도 싶었다. 그렇게 자기연민과 비난과 분노와 상실감이 엎치락뒤치락 싸워서 한 놈씩 번갈아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자다 말고 나오는 욕지기에 화르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밤과 끝을 모르는 새벽의 줄담배를 몇 번이나 지나자, 이상하게 홀가분했다. 토하지도 못하고 지긋지긋하게 헛구역질만 하다가 마침내 시원하게 게워낸 기분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사람과 이별했는데, 오히려 자유롭고 상쾌했다. 그 뒤로 내 삶은 신기하게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목감기에 걸린 나를 위해 따뜻한 물을 떠다 주는 세심한 사람이었고, 추운 날에 겉옷을 벗어주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뜻밖의 작은 선물을 건네는 로맨틱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사랑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 못한 채로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영화에서 보던 가사에서 듣던 바로 그 사랑이 맞았다. 그가 웃으면 세상이 웃고, 그의 손을 잡으면 내리는 비마저 따뜻했다. 흐르는 순간순간이 모두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일말의 의심이나 망설임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를 만나러 갈 때면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가 된 기분이어서,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드디어 일생동안 찾아 헤매던 질문의 답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영락없이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날 때면 언제나 숨이 막혔다.
이상하게 나는 그 관계가 불편했다. 그의 삶에는 언제나 나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았고, 그는 우리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나와의 약속은 늘 그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관계 안에서 나의 감정과 상태는 주목받거나 고려되지 못했다. 나에게 중요한 일은 우리에게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으며, 나는 점점 그런 처지에 익숙해졌다.
그는 대놓고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잘못하지 않았지만 관계를 가꾸어나가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소홀히 하는 방식으로 나를 지치게 했는데, 이 점은 교묘해서 항의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먼저 만남을 제안하거나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고,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외면하고 일상으로 복귀하곤 했다. 나는 애정을 구걸하는 것 같아 늘 자존심이 상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혼자서 분투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외로움과 비참함을 느끼고 서운한 점을 털어놓아도 그는 귀 기울여 듣거나 행동을 개선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대화의 끝에서 나는 나름대로 노력하는 그를 알아주지 않고 자꾸만 조른 것을 사과해야 했다.
나는 내내 자존감이 낮아지는 걸 느꼈다.
그는 내 앞에서 나의 특성을 비난했으며, 나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의 일관성과 합리성을 의심했고, 업무에서나 일상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할 때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질타했다. 나는 점점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들을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를 만난 이후로 나는 그의 기준으로 세상을 봤고, 나 자신까지도 자꾸만 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잘못은 나에게만 있는 게 당연했다. 내가 그의 몫까지 변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 이해하려 노력했다. 전쟁이었다면 늘 먼저 패배를 자처한 것과 다름없었다.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원인과 책임은 늘 나에게 있었고, 나는 매번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난 그저 사랑하고 싶은데, 네가 툭툭 던지는 모든 말은 나를 상처 입혀.’
‘짓밟히고 다시 다가가는 게 나의 삶이야. 나는 너에게 짓밟히기 위해 건강해져.’
‘너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난 이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어. 또 이틀 연속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펑펑 울어.’
당시 내 일기는 이런 구절들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관계를 끝내려 했고 그는 화를 내고 상처받은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 상처마저 내가 받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분명히 관계를 끝내려 했던 나는, 어느새 미안하다고 제발 다시 만나달라고 그에게 빌고 있었다.
나는 페미니즘의 언어를 배우고도 한참 동안 그 경험을 잘 직시하지 못했다. 사랑이라기엔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폭력이라기엔 너무 따뜻했다. 그는 분명히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며, 나의 행복을 바라고 행동했다. 그가 여력과 의지가 없으면서도 관계를 유지했던 선택은 모두 나를 위해 했던 것들이고, 상처 입히려는 의도를 갖지 않았던 건 내가 더욱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아도 폭력을 행할 수 있고,폭력을 행한 사람이 그인 것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사랑은 사랑이고, 폭력은 폭력이다. 어디까지는 사랑이었지만 어디부터는 분명히 폭력이었다. 나는 그게 분리된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 두 가지가 계속 혼재되어 있었기에 내가 배운 언어로 해석을 시도해도 쉽게 답을 낼 수 없었다.
또한, 페미니즘의 데이트 폭력 담론은 주로 젠더 권력의 위계가 있는 이성애에 초점을 맞춰 논의된다. 그 경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 나는 두 가지 지점에서 그 담론을 적용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는데, 우리 관계가 젠더 권력으로부터 좀더 자유롭다는 점과 우리 사이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명확하다는 점이었다.
우선 우리는 이성애 관계가 아니고, 그는 기득권을 가진 남성이 아니기에 나는 한참 동안 문제를 바로 보지 못했다.
이 관계에는 젠더 권력이 없으므로, 나는 판단력을 상실한 ‘매 맞는 아내’와는 달리 주체적인 개인이고, 이 관계에서 빠져나오려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지만 감당하기로 선택한 만큼만 자발적으로 감수하고 있다고 오해했다. 나는 그가 하는 비난이 진심이 아님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가 나를 억압하거나 통제하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단언컨대 오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계에서 기존 권력과는 다르지만 새로운 권력관계가 형성되고 작동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내부에서 더욱 철저하게 이를 인식하고 경계했어야 했다.
다음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우리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았다.
내 시점에서 서술한 이 글에서 나는 피해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입장을 다시 한번 변호하자면 실제로 나는 그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은 채 사랑했고 언제나 서툴렀고 선을 넘었다. 그가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내 모든 것을 억지로 그냥 다 안겨주고만 싶었고, 그의 삶에 나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았던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관계를 시작하면서 합의했던 것들을 떠올리면, 그의 말은 단순한 변명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물론 그래도 결정적으로 관계를 맺기로 직접 선택했음에도 감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후의 행동들이 비겁하고 무책임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어떤 면에 주목하는지에 따라 가해와 피해가 뒤섞이고 교차해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였다. 굳이 가해와 피해의 언어로 따져보자면, 나도, 그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추가로, 우리는 이성 커플보다 더욱 폐쇄적인 관계에 있었다.
나는 아우팅이 걱정되었기에, 제삼자의 객관적인 판단을 빌려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그 상황에 더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의존적인 상황에 놓인 피해자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나의 판단력이 의심되던 순간에 아우팅의 공포를 무릅쓰고 도움을 요청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관계가 폭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관계라는 건 본래 서로의 경계를 탐색하고 침범하면서, 겹치는 부분을 늘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그 경계는 계속 경합하고 재설정되기에 합의된 영역이 분명하지 않아 경계를 침범할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더욱 예민하게 위치를 점검하고, 폭력이 개입되면 항의할 수 있는 평등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 페미니스트일수록, 다름의 영역으로 허용할 관계와 폭력적인 관계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 또한 전형적인 로맨스가 지나치게 낭만화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알고 있었고, 전통적인 연인의 규범과는 달라도 각자의 신념과 형편에 맞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 안의 폭력성을 감지하기가 더 어려웠다. 오히려 관계에 대한 기존의 공식을 끌어왔다면, 우리 관계를 대하는 그의 무성의한 태도를 그의 특성으로 둔갑시켜 이해하려 들기 전에 진작 헤어졌을 것이다.
당시 나는 온 힘을 기울여 그를 존중하고 그의 리듬과 호흡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의 관계는 근대적인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논리와는 거리가 먼 광기의 영역에 있으며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믿었다. 오직 나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고, 맥락을 모르는 관계의 외부에서 우리를 평가하고 분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성애주의에 반감이 있고 기존의 관계가 포괄하는 방식의 한계를 언제나 피부로 느끼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우리는 퀴어였기에 주변의 사례가 언제나 부족했고, 이성애 관계를 참고하기엔 여러모로 뭔가 좀 달랐다.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슷한 처지의 다른 커플과 견주어보며 상황을 객관화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의 논리에 점점 더 갇혀갔고 관계 폭력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그때의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을 누군가가 있다면, 나를 정신 차리게 한 이 두 가지 질문을 소개하고 싶다.
관계 내부에 권력의 위계가 있고, 상대가 알고 있는가?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대하는가?
포인트는 그가 늘 하는 변명과 관계없이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적 관계에도 권력관계가 성립될 수 있고, 그걸 외부에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당사자들은 안다. 둘 간의 권력의 위계가 있는지, 그리고 그가 불평등을 알고도 침묵하거나 이용하고 있는 것 같은지 생각해보자. 당신의 생각이 맞을 거다.
다음으로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지 이해하기를 멈추고, 냉철하게 판단해보자.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대하고 있나? 혹은 그렇게 대할 것 같은가? 이것도 그의 말을 추종하기를 멈추고 혼자서 스스로 판단해보자. 상대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태도들을 당신에게만 유지하고 있다면, 당연하게도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에 정해진 답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너무 사랑하는 그 관계가 사실은 폭력이 아닌지 꼭 자문해보길 바란다. 나는 그런 관계가 학대인지 정확히 규정할 역량은 없지만, 나에게 적합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는 그 관계에서 나오자 더욱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만나 비로소 세상의 나뭇잎이 푸르다는 걸 느꼈던 나는, 이별 후 빛을 잃어가는 잎들을 보며 두려웠었다. 공기엔 냄새가 없고 날짜엔 감정이 없고,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고, 그가 없는 한 나에게 삶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의 세상은 다시 서서히 제빛을 찾아갔다. 세상은 빛을 잃은 게 아니었다. 짙게 물들었던 그의 색이 빠지고, 내 색깔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보다 더욱 찬란한 무지갯빛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