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20년차를 바라보는 이다혜 작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마흔을 넘긴 여성 직장 동료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왜 그럴까?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우린 어떻게 버텨야 할까? 이다혜 작가가 잡은 키워드는 말, 글, 네트워킹이다. 존댓말이다가, 평서문이다가, 수다를 떠는 것 같다가도 진지한 조언을 해 주는 책, <출근길의 주문> 이다혜 작가를 <핀치>가 인터뷰했다.
‘일하는 여성’에 대한 글을 모아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신 계기가 있나요?
저는 결혼하지 않은 40대 여성 근로자입니다. 20년 가까이 일을 하는 동안 처음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동료들과 함께 일했고, 제 또래의 동료들이 있었고, 점점 저보다 한참 연하인 동료들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는 동안에, 일을 대하는 태도나 생각 역시 많이 바뀌었어요. 하루하루 어렵사리 자리를 지키는 40대 이상의 동료들에게 수고했다고, 우리 조금 더 버텨보자고, 젊은 여성 동료들과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커리어를 시작한 지 오래 되지 않은 분들께는, 지금 겪는 어려움이 무엇이든 혼자 겪는 일이 아니라고, 그러니 연결되어 있자고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성별을 떠나 일반적인 직장생활에 대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조직에서 여자들만 유난히 자주 겪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가 여성을 차별하는 상황에서, 일터의 불평등은 말투부터 옷차림, 급여, 승진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칩니다. 제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들을 묶었습니다. 말과 글, 직장과 커리어, 네트워킹과 피드백에 대하여. 제가 아직은 조직생활을 하는 동안 정리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입니다.
띠지에 ‘체감 정년 갱신 프로젝트’라는 말이 독특합니다. ‘체감 정년’이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삼십대 중반까지는 일만 열심히 하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국 위로 올라갈수록 이상한 그림 안에 놓여 있게 되더라고요. 마흔을 넘긴 지인들이 하나 둘씩 조직생활을 그만두기 시작했습니다. 둘러보면 또래의 여자, 연상의 여자들이 줄어드는 기현상. 정년퇴직할 나이가 되기 전에 일을 그만두는 여성이 많습니다. 오십대 여성 간부가 당신의 회사에는 얼마나 있나요?
일을 좋아하는데도 그 안에 있기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요소들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여성들이 일터를 떠나게 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어 왔는데, 나이 든 여성 역시 조직생활을 버티기 어렵다고 느끼는 때가 오더라고요. 프리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에서 프리랜서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느끼는 나이를 지나면 일을 받기가 어렵다고 느껴지기 시작하거든요. 갑보다 나이 든 여성 프리랜서는 일을 안 해도 먹고살 방법이 생기나요? 몇 살 이상이면 여성을 해고하는 문화는 없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여성의 비율이 급격히 낮아지는 현실을 ‘체감 정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표지가 인상적인데요. 출근길 여성들의 발걸음이라고 상상했을 때, 개인적으로 여러 신발 사이에 ‘하이힐’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안 그래도 힘든 출근길에 하이힐을 신기는 더욱 고달픈데, 역설적으로 아직도 미디어에서는 하이힐과 H라인 스커트가 마치 프로페셔널한 여성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일터에서 여성이 마주치는 많은 딜레마 중 하나인데요. 의도하신 부분인가요? 표지 결정의 뒷이야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출근길의 주문> 표지는 제가 시안을 보지 못하고 바로 최종안을 인쇄 직전에 확인했습니다. 원래는 높은 굽의 구두가 있었고, 운동화가 없는 일러스트였습니다. 저는 구두굽 높이를 낮출 것과 운동화를 추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진 결과물이 보시는 책의 표지입니다.
구두의 굽 높이를 낮춘 이유, 그리고 운동화를 추가해달라고 한 이유는 제가 출근할 때 운동화를 주로 신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잘 가꾼 몸매와 피부, 공들인 화장, 하이힐을 신고도 뛰어다니는 모습 등으로 미디어에서 오랫동안 표현되어 왔습니다. 신뢰할 만한 동료가 되자는 내용의 책을 쓰는 상황이니만큼, 활동성을 방해하는 높은 굽의 구두는 의도적으로 없애고 싶었습니다.
여성이 당장 해결할 수 없는 흔한 직장 내 성차별적의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섞여있다고 생각했어요. 둘 중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셨나요?
‘회사’라는 말로 일반화할 수 없는 수많은 제각기 다른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월급의 액수부터 휴가 일수, 출퇴근 시간, 동료와의 관계와 회사의 장래성 등 수많은 분야에서 모든 회사는 다릅니다. 같은 회사를 다니는 이들이라 해도 속한 부서에 따라 체감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급여수준이 높고 임원진이 여초인 회사는 신기할 정도로 찾을 수가 없고, 온통 그 반대의 경우만 눈에 띕니다. 어떤 회사를 다니든 여성들이 느끼는 답답함은 비슷할 텐데요.
저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쪽입니다. 조금 더 ‘나’ 하나에 집중하면서 기회를 만들고, 버텨보자는 건데요. 제가 그나마 지금까지 일을 계속하는 데는 (꼭 같이 일하는 사이가 아니어도) 일하는 여성들과의 관계가 큰 힘이 되었거든요.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건 고통만 가중시킵니다.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해 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님 말고.” 같은 문장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가벼운 분위기가 이색적입니다. 커리어에 대한 얘기라면 뭔가 ‘각 잡고’ 해야 할 것 같은 딱딱한 느낌이 전혀 아니었어요. 존댓말과 반말, 구어체와 문어체를 오가기도 하고요. 이런 스타일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지요?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고,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보고, 그 두 가지로 지금까지 일해왔습니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대신에 생각나면 그냥 해보는 쪽이었어요. 해보면 알 수 있거든요, 계속해 나갈지 말지. 가장 좋은 공부는 돈 받으면서 하는 공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심지어 실력이 있어도 잘 안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거절당하는 일도 자주 생기고. 여성이라면 그런 거절의 경험을 빨리 쌓게 되거든요. 그때 안된 일에 매여 있지 말고, 다음 일로 넘어가는 법을 익히는 게 중요합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된 일만 보게 되어 있어요. 아님 말고, 다음 단계로.
실패를 분석하고 곱씹다가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저는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가볍게 쓰고 싶었어요.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때는 다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책의 곳곳에서 ‘여성 선배’들에게 어떤 언행은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대부분 일하는 여성을 위한 ‘충고’가 들어간 책은 젊은 주니어급이나 사회초년생을 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 부분이 가장 달랐습니다. 따끔한 충고는 기성 세대에게, 독려와 공감은 더 아래 세대를 향하는 기분인데요. 어떤 의도였는지 궁금합니다.
#MeToo가 그 이유였습니다. 저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이들과 주로 일을 해왔습니다. 여성의 비율이 낮은 편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MeToo 관련 뉴스가 이어지면서 애석하게도 연차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너무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능력으로 존경하던 연상의 여성들이 “나는 몰랐어” “우리 때는 더했어” “지금 너무 심한 것 같아”같은 말을 하는 걸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 말이 거짓말도 아닙니다. 제가 회사생활을 시작했던 때는 더 심각한 일들이 발생했고, 어떤 여성들은 피해를 알리는 대신 조용히 일을 그만두고 업계를 떠나곤 했고, 다들 참는 데는 이력이 났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그런 환경을 견뎠다고 해도 지금 일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지금은 더 낫다”고 말할 자격은 없겠지요. 최소한, 지금의 엉망인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 발목 잡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선배들은 여성 후배들과 일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할 때도 있어요. 여성 후배는 ‘나의 젊은 시절’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여성 상사들에 대한 관용을 젊은 주니어급이나 사회초년생에게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어쨌거나 그들이 버틴 시간은 무척 혹독했으니까요.
직장 상사 중 신입 시절을 겪지 않은 이는 거의 없죠. 그래서 말하길 “나도 그랬어”라고 합니다. “나 때는 더했어”도 있어요. 저도 그런 말 자주 해요. 저 역시 잘못을 하고 삽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배우기를, 애초에 다른 그림 안에서 일을 시작한 이들에게 나 때를 기준으로 말하는 습관을 의도적으로 고치도록 해야겠다는 거였어요. 이것은 노력을 할 뿐으로, 얼마나 성공하는지는 저와 일하는 연하의 여성 동료들에게 물어야 알 일이겠지요.
어떤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시나요? 어떤 독자를 떠올리며 쓰신 책인지 궁금합니다.
연령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쓴 책입니다. 30대 후반 이상의 여성들에게는 수고했다고, 조금 더 힘내보자고 말하고 싶었고, 이제 일을 시작하시는 분들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여성들에게는 앞세대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길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성들끼리 힘을 합해 일을 만들어 내기 위해 꼭 서로 절친이거나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호불호를 뛰어넘자는 말이 이 책의 네트워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어떤 부분은 오히려 직장에서 흔히 만나는 전형적인 남성 ‘꼰대’ 상사들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여성도 오래 일할 수 있는 직장 문화를 위해 남성들이 바뀌어야 하는 점도 있는데요. 그들은 이런 책을 읽을까요? 읽으면 바뀌긴 할까요?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꼰대 남자 상사들은 이런 책을 읽지 않습니다. 어떤 책이든 읽긴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요. 그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편이 가장 편리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여성들과 일하는 남성들이 바뀌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저는 그 부분에서 노력하고는 있지만, 남자들이 그나마 조심하게 만드는 정도지 얼마나 바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광의의 협업이 여성들 간에 필요하겠지요. 여성 정치인들이 일터의 여성들을 위해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일에 더 열심이면 좋겠습니다. 이미 기득권을 갖고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특권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눈앞의 불이익이 발생할 때 절차를 갖춰 항의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런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말과 글을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일’이라고 하면 특정한 조직에 속해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을 연상합니다. 프리랜서에 대한 부록을 첨부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체감 정년’의 문제는, (책에도 썼지만) 30대 후반이 지나면 여성의 이직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때 많은 이들은 전업 프리랜서가 됩니다. 회사의 일원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 처한 이들을 위한 가이드이기도 하고, 또한 이미 프리랜서로 일하는 분들을 위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프리랜서에게도 네트워킹이 필요하고 ‘워라밸’이 필요합니다. 이 책의 다른 부분들 역시 프리랜서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썼습니다.
작가님께서 일하면서 힘들 때 도움이 되었던 책이 있다면, 한두권 추천해 주세요.
저는 일하다가 힘들 때는 다른 일하는 여성들을 만나거나, 푹 쉬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핀치 독자들의 대부분은 2~30대 여성입니다. 일을 하고 있거나, 일을 할 예정인 대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동지로서 한 마디 격려를 남긴다면?
이십대와 삼십대에는 “내 나이가”로 시작하는 근심은 집어치우고 해보고 싶은 것들에 다양하게 도전하세요. 직장을 다녀보고 난 뒤에,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옮기고 싶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여성 동료들 중 여러 사람이 회사를 다니며 돈을 모아 유학을 가거나, 아예 시험 준비를 해 이십대와 다른 일을 하며 삼십대를 보냈습니다. 멀리 가시고, 높이 오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