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 [day-dreaming, 白日夢]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멍청한 여자’가
보고 싶어졌다
‘전전(戰前) 시대의 제1세계를 사는 비장애 이성애자 백인 귀족 남성’.
다음 생에는 꼭 이렇게 태어나고 싶다. 십여년 전, 석사과정에 입학해 식민지 조선문학을 전공한 이래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나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식민주의, 탈식민주의, 인종주의, 여성주의, 민중주의 등 학습해야 할 지식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질려버렸고, 이 모든 것들이 정말 꼭 필요한 것인지 따져보고 싶었다. 내 잠정적인 결론은 ‘아닐 수도 있다’였다.
책장에 빼곡히 꽂힌 온갖 종류의 이론서들을 조사해보니 한 저명한 남성학자는 여성의 존재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혁명이론을 설파하고 있었고, 서구의 한 백인 페미니스트 석학은 피식민의 역사를 가진 유색인종의 현실을 거의 반영하지 않은 여성해방이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서 닳도록 배운 식민지의 특수성과 성정치의 문제가 숱한 국제학술대회들에서 매우 주변부적인 주제로 취급되는 장면을 목도한 것도 여러 번이다.
결국 위에 언급한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은 주류 지배담론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느낀 소수자들이 스스로 ‘필사적으로’ 발명・발전시킨 지적 산물이었다. 그 모든 소수자 이론들은 지극히 ‘실용적’인 학문이었던 셈이다.
이 점을 깨닫자, 나는 피식민의 역사를 가진 동아시아 국가의 여성으로서 나를 설명하기 위해 저렇게나 많은 이론들이 필요하다는 점이 일종의 ‘천형(天刑, 하늘이 내린 형벌)’처럼 느껴졌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저런 소수자 이론을 하나도 몰라도 그저 ‘편안한’ 존재로 태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설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감행되는 소수자성 성찰, ‘생계형’ ‘실용적 목적’의 지식이 아니라, 그야말로 ‘무쓸모의 지식’을 지향하는 ‘순수학문’ 전공자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진심이었을까, 농담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그런 ‘학문’은 가능할까.
물론,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해본 적은 없다. 사실 나는 ‘주변부의 삶을 몰라도 되는 지식인’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 피식민국가의 여성으로 태어나 내가 얻게 된 역설적인 축복은, 내가 그 ‘무지의 편안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이해하고 비웃고 성찰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지식에 비교적 친숙하다는 점이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페미니즘의 도전, 2005>)라고 정희진이 쓴 문장에 나는 여러 번 밑줄을 그은 적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어떤 강력한 지배자나 구조의 ‘피해자’에 불과했던 존재가, 자신이 입은 피해의 맥락을 끈질기게 성찰해, 끝내 어떤 ‘구조적 앎’을 획득하고 일종의 ‘전문가’가 되는 장면에서 늘 엷은 전율을 느낀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스스로 선박의 구조와 운영방법, 문서 아카이빙 원리, 바다에서 습득된 유실물 탈염 노하우 등을 공부해서 일종의 ‘전문가’가 된 세월호참사 유가족들(<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그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성폭력피해 상담활동가로 성장한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이는 내가 그 어떤 경우에도 ‘무지’보다는 ‘앎’이 낫다고 믿는 이유, 계몽주의가 시효 만료되고 ‘포스트-트루스’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모든 강의의 결론을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보는 게 나아요. 게걸스러울 정도로"라고 끝맺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내가 ‘무지’를 적대시해온 이유, ‘앎’에 대한 내 오랜 강박을 설명하기 위한 서설이다.
만나고 싶은 여성 인물
'멍청한 여자'
여성서사를 통해 만나고 싶은 여성인물은?
지난 7월 4일, 한 행사에서 받은 질문이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와 여성주의문화운동 단체 ‘언니네트워크’의 창립 15주년을 축하하는 토크쇼 <여성주의, 스토리텔링을 질문하다>라는 행사였다. 출연자들과 100여 명이 넘는 관객의 답은 다종다양했다. 힘 센 여자, 초능력을 이용해 영웅적인 일을 벌이는 여자, 주식 투자로 목돈을 날려먹는 여자, 광기에 휩싸인 여자……. 이윽고 내가 대답할 차례가 오자, 나는 무심결에 ‘멍청한 여자’라고 말해버렸다. 왜였을까.
사실 나는 한번도 ‘멍청한 여자’가 되고 싶은 적도, 그런 여자를 좋아해본 적도 없다. 오히려 나는 늘 내가 ‘멍청한 여자’가 될까봐, 혹은 ‘멍청한 여자’로 보일까봐 두려웠고, ‘멍청한 여자’를 경멸했으며, ‘멍청한 여자’를 보면 내가 바로 그녀인 양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일례로, 나는 영화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등을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여성인물들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결코 그녀들을 좋아할 수 없었다. <씨네21>의 한 대담(「[스페셜] 이경미, 박찬욱 감독 대담으로 <비밀은 없다>가 남긴 것들을 되짚어보다」)에서 박찬욱 감독이 잘 지적한대로,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공효진 분)이나 ‘이유리(황우슬혜 분)’, <비밀은 없다>의 ‘김연홍’(손예진 분)은 하나같이 “맹목적이고 시야가 좁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는 처지에 놓인” 어딘가 “멍청”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혁파가 긴급한 이 시국에, 지혜를 모으기는커녕 어딘가 나사 빠진 것처럼 맹한 여자들. 나는 그들을 종종 ‘못된 여자’보다도, 심지어 ‘가부장 남성’보다도 더 증오했던 것 같다. 2017년 서강연극회에서 올린 연극 <82년생 김지영>의 대단원이 그간 ‘김지영’이 읽어온 모든 책들을 집어던지고 무대를 여성의 출산으로 인한 피로 시뻘겋게 물들이며 끝날 때, 나는 그게 성평등이 요원한 현실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는 ‘허울 좋은 지식들’에 대한 비판임을 감지하면서도 진심으로 놀랐다. 용도 폐기되는 책들, 지식들, 앎들.
그런데 나는 왜 ‘멍청한 여자’를 보고 싶다고 했을까.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 걸 알아야만 하는 ‘소수자성’ 그 자체에 피로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성애화된 백치‘미’가 아니라 ‘백치’ 그 자체일 수 있는 권리를 원했을 수도 있다.
‘여자는 좀 멍청하면 안 돼?’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무지'의 맥락
하지만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박민정의 단편소설 <세실, 주희>는 서로 다른 ‘앎’과 ‘무지’의 맥락에 배치된 두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여행을 간 ‘주희’는 한 축제날 밤 으슥한 거리에서 영문도 모르게 ‘(목걸이를 줄 테니) 가슴을 보여줘!’라고 외치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이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우연히 한 포르노사이트에서 발견하게 된다. 주희는 탓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사전에 그 축제 관행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친구 ‘J’를.
한편, ‘세실’은 오직 가수 ‘유노윤호’의 나라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에 왔고, 유노윤호의 고향 광주에 가보고 싶어 하며, K뷰티에 빠진 일본인 여성이다. 그런 세실이 살짝 한심하다는 듯, “윤호는 일본에서도 볼 수 있지 않아요?”라고 묻는 주희에게 세실은 되물었다. “주희 씨는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 없죠?”
세실은 주희에게 자신의 할머니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종군간호부 역할을 하다 죽어간 여고생 부대”의 한 명이었으며,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묻혀 있다는 것,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은 바로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주희는 이내, 정말 세실의 할머니가 “전원이 순결한 미혼녀”였으며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결한 소녀부대’에 속해 있었다면, 어떻게 세실의 엄마를 낳을 수 있었겠냐고 반문한다. 세실은 “할 말을 잃고 어색하게 테이블만 바라”본다.
마지막은 크리스마스이브 에 명동거리를 걷는 주희와 세실의 대화 장면이다. 그날 명동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는 집회가 한창이었다. 외국인이기에 ‘정치적 집회’ 참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세실에게 주희는 말했다. ‘이건 전쟁피해자들을 기리는 평화로운 집회’라고. 그제서야 세실은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라며 안도한다. 주희는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과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는 세실의 할머니는 결코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세실에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희는 생각해냈다.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던 J가 “피곤하면 안 가도 돼”라고 말할 때, “아니 따라가고 싶어”라고 대답한 자신을.
소설이 이렇게 끝났을 때, 나는 이건 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의도적으로 세실을 무지 속에 놓아둔 채, 주희의 자기 성찰 장면만을 명백히 한 이 결말이. 세실이 맹목적으로 연예인을 좋아하는 ‘빠순이’인데다가 제국 일본이 저지른 폭력의 역사를 성찰하지 못한 채 민족주의에 함몰된 여성으로 그려진 데 반해, 주희가 각종 자료를 섭렵해 세실의 말을 검증하고 반박함으로써 지적 우위를 선점하는 이 구도는 의뭉스러웠다.
하지만 이 소설을 두 번 읽고 나서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볼 수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맹목적이고 몰역사적인 존재로 그려진 세실이 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려는’ 의욕과 행동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생각났다. 세실이 꾸준히 한국어를 ‘배우려’ 하고,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 와서 취직을 감행한 것은 ‘능력’이 아닌가? 무엇보다 무지의 상태에 방기된 채 명동 집회 대열을 가로지르는 세실에게서, 주희가 축제날 스스로 남자들을 따라간 미국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을 오래 곱씹어봤다. 그러고 보니 이 장면은, 주희가 그랬던 것처럼, 세실에게도 한국에서 겪은 이 모든 경험의 의미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가 훗날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 같았다.
소설은 당장 독자의 눈앞에 세실의 성숙과 인식적 고양을 확인시켜주지 않았다. 하지만 주희와 세실이 서로 번갈아 저지르는, ‘무지’에 의거한 실수와 무례, 오인과 폭력이 결코 ‘가망 없는’ 무언가로 연상되지 않았던 것도 명백하다. 오히려 소설은 온갖 불쾌와 불온, 불운과 불의를 초래하는 이 ‘무지’를 너무 손쉽게 해소하려 들지 말라고, 시간을 들여 그 ‘무지’의 의미를 찬찬히 음미해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무지에 대한 혐오, 앎에 대한 강박 또한 젠더화된 감각이자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나는 세실의 입장에서 써진 또 한 편의 소설을 기다리면서 새삼 인정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비로소, ‘멍청한 여자’가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