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3. 인공의 세계

생각하다칼럼드라마일본퀴어

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3. 인공의 세계

허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백일몽 [day-dreaming, 白日夢]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쉬는 시간에 일본 드라마를 보는 것은 나의 오래된 취미다. 일에서 돌아와 잠들기 전, 혹은 혼자 밥을 먹을 때 보기에 가장 적절한 것이 일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한 회씩 끊어지는 에피소드, 가벼운 사건 전개, 감정이입을 요구하지 않는 인물 등. 

나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인공미를 무척 좋아한다. “네, 이것은 다 드라마 속 이야기입니다.”라는 설정이, 오히려 재현물로서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제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는 일본 드라마의 유령을 지키고 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일본의 황금기를 함께 지켜본 일본 드라마는 2010년대 이후 눈에 띄게 하락세를 드러냈다. 시청률이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작품의 문제의식이나 질이 낮아진 것이 더 문제였다. 한국에서 일본 드라마를 시청하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 드라마가 케이블과 종편을 통해 다양한 실험을 거쳐 발전하고 있는 중, 일본 드라마는 도리어 그 문제의식이나 재현방식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 시장에서 일본 드라마의 점진적 후퇴에는 한국 드라마의 질적, 양적 성장이라는 배경도 존재한다.

일러스트 이민

퀴어서사라는 돌파구

이러한 문제의식은 아마 제작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그 돌파구로 제시된 것이 퀴어 서사다. 우경화와 장기불황의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동성혼’으로 자신들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뽐낸 것처럼 말이다. 

2019년 2분기 일본 드라마 <어제 뭐 먹었어?>는 <오오쿠>, <서양골동양과자점>으로 유명한 요시나가 후미의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2007년부터 매달 연재 중인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도 꽤 인기를 끌었다. 잘생긴 변호사와 다정한 미용사 게이 커플의 먹고 사는 이야기다. BL(Boys’ Love)의 ‘진화형’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BL이라기보다는 요리만화에 가까울 만큼 일상 속 동성애자의 모습을 재현한다. 일종의 리얼리즘 텍스트로 등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판 주인공은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맡았다. 잘생긴 남자 스타가 게이 역할을 맡아서 드라마를 찍는 것도 드문 일이다.

작년 NHK에서는 게이 만화가 타가메 겐고로 원작의 <아우의 남편>(弟の夫)을 드라마로 방송하였다. 형인 ‘나’에게만 커밍아웃을 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 동생의 남편이, 동생이 죽은 후 일본에 와서 가족인 나를 만나는 설정이다. 이 만화는 남성 동성애자, 커밍아웃, 가족의 해체, 이후의 진정한 이해에 대한 문제를 다룬 텍스트이다. BL이 사랑과 섹슈얼리티뿐 아니라 일상과 정체성까지 함께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인 타가메는 이 작품을 통해 동성결혼과 인권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두 작품이 비교적 ‘건전한’ 톤으로 BL과 퀴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2018년 후지TV에서 방영한 <포르노그래퍼>는 비교적 수위가 강한 러브신이 등장한다. 성인용 포르노 소설을 쓰는 작가와 대학생 사이의 사랑을 다룬 이 작품은 원작 만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연출로 인해 한국의 일본 드라마 매니아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이처럼 최근 일본 드라마 시장은 BL 원작 작품을 드라마화하거나 아예 자체 제작 컨텐츠를 내놓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작품 모두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였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이자 한계다. 일본 드라마만의 리얼리즘 속에서 원작의 대사는 그대로 배우에게 옮겨간다. 드라마화하는 과정에서의 각색이나 고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오타쿠나 부녀자(BL을 즐기는 여성들)를 모델로 한 드라마가 그렇듯, 서브컬쳐를 드라마로 끌고 와서 서브컬쳐 시청자들을 유치하고, 일반 드라마에 싫증 난 시청자들을 다시 불러오겠다는 발상이다.

일러스트 이민

퀴어서사라는 전형성

그래서일까. 작년 여름에는 일본의 아사히 텔레비전이 <아재's 러브>(おっさんずラブ)라는 드라마를 방송하였다. 부장인 중년 남성이 부하직원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부장님, 사원, 후배 등 남성 세 명의 삼각관계로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재’s 러브>는 BL의 드라마화로 불리며 여초 사이트에서 화제를 모았으며, 일본 내에서도 스핀오프 제작을 요청할 만큼 반응이 좋았다. 텔레비전 드라마이기 때문에 섹슈얼한 묘사는 키스나 포옹 정도에서 끝났지만, 남성들 간의 삼각관계라는 설정 자체가 BL에 훈련된 여성독자들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퀴어 서사가 일본 드라마가 가진 한계점을 쉽게 보충할 수 있는 대체물로서 부상하고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때, 서사나 장르 자체에 대한 고민은 수반되지 않는다. 퀴어 서사는 형사물, 연애물, 의학물과 같은 드라마 장르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물론 BL 원작의 드라마가 드라마를 통해 퀴어를 가시화하고, 퀴어 담론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중요하다. 김효진이 지적한 것처럼, 인공적인 표상이 실제 정치에서 갖는 힘은 강력하기 때문이다(김효진,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사이에서-요시나가 후미 만화의 게이 표상을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56 (2), 2019). 하지만 BL식 드라마는 BL의 세계관을 추종할 뿐, 새롭게 더하거나 깁지 않는다. BL이 특정한 향유층과 함께 만들어온 세계를 그저 옮겨올 뿐인 것이다. 이 확산과 전파는 퀴어 드라마를 심야시간에 방송하는 마니아형 드라마로 환원한다. 이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인공성과 만나 더 전형화된다. 다른 이야기를, 혹은 다양한 이야기를 BL로 쉽사리 대체하려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 

허윤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칼럼에 관한 다른 콘텐츠

드라마에 관한 다른 콘텐츠

퀴어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