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8.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

생각하다칼럼위안부

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8.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

허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백일몽 [day-dreaming, 白日夢]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배삼식의 희곡 「1945」(민음사, 2019)는 명숙과 미즈코라는 두 여자를 중심으로 1945년의 귀환자들에 주목한다. 해방과 함께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조선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곳곳에 조선인 전재민을 위한 구제소가 세워졌고, 귀환한 학도병이나 지식인들의 이야기는 민족국가와 민족문학을 재건하는 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는 “어른들의 소문”으로만 존재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만든 1세대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 윤정옥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여성들이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소문을 들으며 성장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더라,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서 알아보고 말이지. 그 얘기 들으면 어떡할 수가 없어. 안 찾아다닐 수가 있어? 찾아다니지.”*1 윤정옥은 돌아오지 않은 여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1945」는 그때 돌아오지 못한/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질문하는 작품이다.

「1945」는 두 여자가 일본인이 낳은 아이를 중국인들에게 파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는 위안소에서 나온 이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아이를 거래한다. 일본인의 아이는 유전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더 비싼 값에 팔린다는 식민지의 이데올로기는, 해방이 와도 여전하다. 이들이 아이를 판매하면서까지 돈을 마련한 이유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일본인인 미즈코는 임신한 상태이지만, 패전한 상황에서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어 위안소에서 함께 지냈던 명숙에게 의지한다. 명숙은 미즈코를 말 못하는 자신의 동생으로 속여서 조선인 구제소에 데리고 간다. 일본인 여성이 해방 이후에 살아남기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1945」는 해방의 감격과 기쁨만을 그리지 않는다. 착취당하던 식민지인들이 해방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복잡함을 재현하는 것이다. 일본인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던 아이들은 이제 일본어를 쓰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호통에 당황한다. 어제까지 친구였던 일본 아이들이 거지 꼴로 굶고 돌아다니는 광경도 목격한다.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명숙과 미즈코가 합류한다.

일러스트 이민


말할 수 없는 비밀
해방되어도 해결되지 않은 균열

명숙과 미즈코는 무리 없이 조선인들 사이에 섞여 들어간다. 구제소에서 위안소 시절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맡았던 선녀를 만나지만, 세 여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사실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1945」는 일본군 ‘위안부’가 왜 돌아오지 못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위안부’인 채로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여자들의 이름이 생각났다. 배봉기, 송신도 등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을 마친 재일 조선인 ‘위안부’들이다. 배불리 먹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오키나와의 위안소에 끌려간 배봉기는 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자연스레’ 미군 위안부가 되었다. 그는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자 일본인이 아닌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미군의 차에 탄 채 선글라스를 끼고 스카프를 휘날리고 있는 명숙의 모습에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많은 여자들이 겹쳐졌다.

「1945」의 미덕은 선과 악, 우리와 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경계를 그린다는 데 있다. 전재민 구재소에서 박씨가 전염병에 걸리자 사람들은 그를 내쫓아야 한다고 합의한다. 미즈코가 일본인인 것이 알려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미즈코와 명숙이 ‘위안부’였다는 것을 알자,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진다. 한국문학이 늘 중심으로 상상했던 ‘민중’이 약자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은 자로 등장한다. 명숙을 좋아해서 신분증이 없는 미즈코의 기차표도 마련해준 영호 역시 시혜적인 태도로 명숙과 미즈코에게 모멸감을 준다. “더 새까맣게 그을린 게 이 여자들 잘못은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는 명호에게 명숙은 “어떤 지옥도 우리를 더럽히지는 못했어. 하지만 당신 앞에 서 있으면, 우리는 영영 더러울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대루 갈 거야.”라고 응수한다. 

미즈코를 보내고 조선인들과 함께 기차를 타자는 영호에게 명숙은 자신이 겪은 지옥을 아는 건 미즈코뿐이라며, 단호하게 영호의 제안을 거절한다. 명숙의 응수는 1945년에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구제소의 조선인들, 선의를 가진 영호는 명숙을 계속 ‘더럽혀진 여성’으로 볼 것이라는 명숙의 단호함은, 해방의 희열로 설명되지 않는 균열 지점을 노출한다.

「1945」는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의 귀환 과정을 통해 두 여자 사이의 연대를 그린다. 일본군 ‘위안부’ 서사에서 두 여자의 연대는 자주 등장한다. <아이캔스피크>(김현석, 2017)에서 나옥분은 문정심을 대신해 미국에 가서 증언대에 오른다. 일본군 ‘위안부’임을 감추고 살았던 나옥분에게 문정심은 자신의 꿈을 의탁한다. <눈길>(이나정, 2017)의 종분과 영애 역시 위안소에서의 삶을 함께 보낸 친구다. 종분은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감으로써 두 사람 몫의 삶을 산다. <허스토리>(민규동, 2018)의 배정길은 함께 위안소를 탈출한 친구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1945」는 이 두 여성의 우정과 연대를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관계로 그려낸다. 일본군 ‘위안부’ 재현에 있어서 넘지 못했던 민족국가의 경계를 명숙과 미즈코가 넘어선 것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재현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 많은, 더 복잡한 이야기들이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몸피를 풍성하게 해줄 것을 기대해본다. 

*1 기억해야 할 첫 발걸음, 1세대 연구자를 만나다 - (1) 윤정옥,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소 웹진 결, 2019.3.13. http://www.kyeol.kr/node/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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