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기억하고 기록하고 연대하는 여자들: 어폴로지,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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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기억하고 기록하고 연대하는 여자들: 어폴로지, 눈길

유희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위안부 생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어폴로지>와 <눈길>은 모두 문제 해결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령에 접어든 생존자들이 더 이상 증언을 하거나 사과를 받을 수 없게 되기 이전에 이 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어야 한다는 시급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눈길>은 허구적 서사의 형식을, <어폴로지>는 생존자들의 현재를 담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두 편의 영화는 생존자의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생존자’의 주체적인 모습에 주목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를 통해 두 영화는 생존자의 과거뿐만 아니라 사건이 기술되는 현재, 그리고 그 사연을 듣는 청자의 반응과 상호작용이라는 복합적인 양상을 담아낸다. 이제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사건을 재생산하는 대신, 기록, 기억, 상처와 연대, 과거와 현재, 국민과 개인 등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나눠야 할 때다.

어폴로지(2016) [다큐멘터리, 캐나다] 2017. 3. 16 개봉

티파니 쉥 감독 길원옥, 차오, 아델라 주연

당신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이미 많이 이야기된,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은 의외로 단층적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제국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행한 만행’이라는 틀에서만 이해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당신이 간과했던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의 길원옥, 중국의 차오, 필리핀의 아델라라는 세 생존자의 ‘현재’를 보여준다. 길원옥 할머니는 활동가로서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연을 나누고 관심을 호소하고, 차오 할머니는 입양한 딸에게, 아델라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지금까지 숨겨온 과거를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이 세 사람을 ‘할머니’로 호명한다. 이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먼저, ‘특수하고도 극단적인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로 세 사람을 보통 사람에서 떼어내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고(피해자는 어디에라도 있을 수 있다), 또 얼마 후면 이와 관련된 중요한 한 시대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 다시 말해 이미 ‘노인’이 된 생존자들이 사과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부각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세 할머니가 사회적 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은폐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상처를 재의미화하는 과정에 동행한다. 길원옥 할머니에게 그것은 사명감을 동반한 사회 정의 실현이고, 아델라 할머니에게는 가족에게 거짓말을 해왔다는 죄책감에서 놓여나는 일이며, 차오 할머니에게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입양한 딸에게 진실을 전하는 일이다.

영화가 이뤄내는 성취는 정확히 이 동행의 감각이다. 인권 운동가인 길원옥 할머니의 모습마저도 할머니가 활동가들과 나누는 사적 연대, 노래를 부르고 잠을 자고 장난을 치는 모습에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역사적 경험과 개인의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개인의 감정과 ‘무대 밖’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문제의 중대함을 축소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진정한 연대는 여기서부터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길원옥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한 일본 여학생은 “한 여성으로서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먼 타국에서 다른 생존자가 활동하는 이야기를 들은 필리핀의 할머니들은 “당장에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고 의지를 보이고, 엄마의 과거를 처음 들었다는 차오 할머니의 딸은 “내 딸이 조금 더 자라면 모든 이야기를 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위안부’ 생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파티에 사람들이 초대해주지 않는다고 의기소침한 아델라 할머니에게 젊은 활동가가 전한 말처럼, 생존자들은 목소리를 냄으로써 침묵과 소외에 잠겨 살던 다른 생존자들에게 희망과 기회를 준 용기 있는 사람들, 변화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이들의 목소리에 연대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생의 어느 국면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위기에 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연대는 동정과는 결이 다르다. 할머니들의 과거는 이 여성들에게 남의 일로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연대자와 생존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에서 벗어난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힘을 보태고, 그 젊은이들의 삶에서 일어난 불의에 목소리를 높이게 해주는 것이 할머니들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연대가 시혜적인 행위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렇게 (이미 벌어졌거나 벌어질 수 있는) 불행한 경험을 겹쳐보는 일이 아닐까. 피해자/생존자라는 위치가 고정되거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것임을, 그것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소인 동시에 도움을 ‘제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생존하여 증언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생존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하여 고통이나 폭력과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눈길(2015) 2017. 3. 1 개봉

이나정 감독, 김영옥, 김향기, 김새론, 조수향, 이주우 출연

어떤 부당함, 어떤 상처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특정한 사건이 해결되지 않기도 하고, 유사한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길>은 기록과 기억,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하얗고 시린, 폭신하고 포근한 눈길을 따로 혹은 같이 걷는 소녀 둘. 종분(김향기)와 영애(김새론)은 비슷하다기보다는 다른 인물이다. 영화는 한편으로 소녀들이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살아남으려 애쓰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성장 서사다. 영화는 소녀들 사이에 계급과 빈부의 차이가 부각되는 초반에서 공통의 고난 속에서 연대하는 후반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서사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손쉽게 치환될 모든 구도를 영리하게 비껴간다. 그래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전에 익숙했던 깔끔한 선악 구도보다는 더 복잡하고 그래서 진실해 보이는 세계다. 이 세계는 단순하지 않아 인물들의 행동은 ‘선택’의 문제가 되고, 선택의 주체성 때문에 소녀들의 행동은 더 의미 있는 것, 더 가슴 아픈 것, 더 용기 있는 것이 된다.

포르노그래피로 소모되기 쉽고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직접 건드릴 가능성이 높은 소재인 만큼, 영화가 직접적인 묘사를 의도적으로 피해가며 배우들과 관객들을 배려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만약 이 영화가 ‘지금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왜, 그리고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면, 더 꼼꼼히 보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다. 은수(조수향)와 나이 든 종분(김영옥)의 관계다. 돌봐주는 어른 없이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은수가 남의 손 안 빌리고 악착같이 삶을 꾸리는 종분에게는 영 신경 쓰이는 이웃이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동사무소에서 마주친 은수와 종분은 살갑기보다는 서투르지만, 살던 집에서 퇴거당할 위기에 놓인 은수에게 종분이 사소한 친절을 베풂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는 가느다란 실이 이어진다.

종분과 은수는 사실 비슷한 인물이다. 둘 다 가난으로 인해 교육받을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권력을 가진 성인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착취당하며, 우호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도움을 국가로부터 받지 못한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성인이 미성년자를 일방적으로 돌봐주는 것 이상으로 나아간다. 아르바이트 하던 가게의 손님, 업주와 문제가 생긴 은수가 종분을 경찰서로 불러냈을 때, 종분은 은수의 기대대로 무난한 어른의 역할을 해서 경찰서를 함께 나가는 대신 함께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은수와 종분을 멸시하는 추행범에게 “아이를 이용하는 어른들이야말로 죽일 놈들”이라고 덤벼들고, 몸부림치던 와중에 말리려던 경찰을 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치장에서 은수는 드디어 종분에게 마음을 연다. 언뜻 종분이 은수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유일하게 상식적인 어른으로 그녀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동시에 은수의 상황으로 인해 종분이 구원받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가해자들에게 대놓고 말할 수 없던 항변, 그 상식적인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처음 꺼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단단해진다. 경찰서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종분은 은수에게 담배 한 대 달라고 하고 물면서 ‘예전에는 힘들면 다 이렇게 풀었다’며 담배 피우는 심정을 이해해주면서도, 같이 피우려는 은수를 저지하며 ‘그래도 너는 안 돼’라고 말한다. 이런 ‘어른의 걱정’은 은수가 그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선의다.

어른의 우려가 ‘바람직한 형태’로 은수를 재단하거나 가두려는 권력의 행사, 그러니까 착취나 배제, 폭력이 아니라 필요한 도움, 선의, 책임과 연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 순간은 특별하다. 연락이 닿지 않는 부모, 골칫거리 이상으로 자신을 보지 않는 선생, 돈을 타가는 복지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공무원들처럼 ‘돌봄을 제공해야 할’ 어른들에게는 귀찮은 취급을 당하고, 포주, 성구매자, 심지어 경찰에게는 ‘그렇고 그런 여자애’, 성인 남성의 욕구를 위한 도구로 격하당하는 위태로운 지위의 은수에게 종분은 처음으로 금지하기 이전에 이해를 보여준 성인이며, 자신의 필요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은수 본인을 위해 하지 말라는 안전선을 쳐 주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종분은 은수에게 먼저 말을 걸고, 자기가 가진 것을 호의로 내어주고, 믿어주고, 편을 들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은수는 종분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린 여성’이어서 약자가 되고, 남성적 욕망에 동원되었으며, 남성적 권력에 희생되었음을 알아차렸으리라. 그러므로 은수가 종분의 호의를 호의라고 믿게 되는 이 순간에, 두 사람은 아이와 어른이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으로 만난다. 종분은 ‘연장자로서 자신이 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은수에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는 유사한 경험과 관점’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한다. 이때 어른과 아이는 서로 다른 지점, 서로 다른 관점에 불과하다. 두 사람의 평등한 관계는 은수와 종분이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고받으며 함께 지내는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종분이 함께 살며 은수가 학교를 마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면, 은수는 종분이 내내 마음에 담고 살아온 과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됨으로써 그녀가 자신의 수치로 기억해온 상처의 날을 마땅히 부끄러워야 할 사람들에게로 돌린다. 은수로 인해 종분은 ‘영애’의 이름을 빌려 살며 묻어둔 이름을 찾아오고, 오래도록 갇혀있던 과거의 기억에 매듭을 짓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야 그녀는 자신의 몫이 아니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 잘못한 이들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상처를 바로 보는 일, 그것을 과거의 어느 순간에 박제하지 않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일. 영화는 은수와 종분의 관계를 통해서 관객을 현재진행형의 어떤 사건 속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이것은 제대로 기억하는 일, 바르게 연대하는 일, 비극을 예방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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