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정병길 감독)는 2017년 연초부터 김혜수가 조직폭력배로 분한 <소중한 여인>(가제, 이안규 감독)과 더불어 김옥빈이 살인병기로 키워진 비밀요원 역을 맡은 여배우 원톱 액션 영화로 기대감을 모았던 영화다. 최근 몇 년간 빈번하게 지적되어 왔듯이, 국내 영화 가운데 여배우가 맘껏 놀 수 있는 작품은 턱없이 부족하다. 작년에 개봉한 여성 영화들이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흥행에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탓에, 목마른 여성 관객들로서는 더 기다려온 영화였을 것이다.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악녀>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스토리 자체는 자못 실망스럽다. 아버지의 복수, 사랑, 가족을 꾸리면서(즉,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 늘 궁금했던 건데, 대체 왜 남성 감독들은 여성 인물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몸도 목숨도 내놓는 이야기에 이렇게들 ‘꽂히는지’ 모르겠다. 여성 액션을 다룬다고 기대감만 부풀려놨다가 저 흔한 스토리로 진절머리나게 만든 영화 <협녀, 칼의 기억>(박흥식 감독, 전도연, 김고운 주연)이 당장 떠오르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몸 바친 여자의 비극적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화면 좀 예쁜 포르노로 전락한 <간신>(민규동 감독, 이유연, 임지연 출연)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나마 <악녀>가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볼만한 이유는 따로 있다. ‘게임적인’ 화면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여기저기서 지적된 부분이긴 하지만, ‘게임성’은 이 영화가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에 훨씬 더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다. 액션과 폭력을 영화, 게임 등의 매체를 통해 남성들 못지 않게 즐기는 여성 관객층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입할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악녀>는 캐릭터, 장면 구성(미장센), 액션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만족스럽다.
멋있잖아요
이 영화의 엑기스라 할 초반 10분, 관객은 등장인물과 ‘동시에 뛰고 호흡하며’ 영화로 들어간다. 눈으로는 인물이 달리고 뛰어오르고 적을 피하면서 바쁘게 달라지는 장면이 1인칭 플레이어 시점에서 어지럽게 들어오고, 귀로는 쓰러지는 상대의 비명을 배경으로 흐트러진 호흡 소리가 입력된다. 내가 몰입한 인물이 누구인지 영화가 드러내는 것은 스테이지 클리어 직전, 보스몹이 등장하는 던전 끝에서다. 이때 갑작스럽게 시점이 전환되며 등장한 가녀린 여성이, ‘나’의 아바타였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앞부분의 액션이 과격하고, 거구 앞에 선 숙희는 그만큼 작아 보인다. 그 당혹감이 쾌감으로, 그리고 다시 당혹감으로 차례로 전환되는 것은 마침내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숙희가 별다른 저항 없이 경찰에게 투항하기 때문이다.
인물을 강조하는 방식에 있어서 뒤이어 등장하는 회의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어두운 회의실에 중년 남성이 모여 브리핑을 받는 장면에서, 어둠 속에 달칵, 라이터 불이 초점 바깥에서 아른거린다. 이어 담배에 불을 붙인 인물은 여전히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궁금증을 있는 대로 부추겨 놓은 후 카메라가 잡는 것은 권 부장(김서형)이다. 여성 인물에 힘을 실어준다는 측면에서 단연 매력적인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시간이 좀 흘러야 밝혀지지만, 국정원 비밀 조직의 수장인 권 부장은 그야말로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다. 감정이 절제되어 있고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때로 부하들에게 취하는 태도가 인간적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 그림은 좋은데 숙희와 권 부장 사이에 대단한 교감이 그려지진 않는다. 권 부장은 플레이어에게 퀘스트를 던져주는 NPC(non-player character) 정도의 비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 초반부터 두 인물에게 이렇게나 힘을 실어주는 이유? 화면이 멋져서 아니겠나.
캐릭터가 구성하는 화면이 게임 같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상당 부분 요정 전투 신과 웨딩홀 저격 신 때문이다. 가령, RPG에서 캐릭터 복장은 곧잘 스토리의 빈약함에서 유저들의 눈을 돌리도록 만드는 장면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탑드레스처럼 한복 치마만 걸치고 비녀에서 뽑은 칼로 싸우는 장면이라든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고풍스럽게 꾸민 방(화장실이지만)에서 저격용 총을 겨눈 여자, 여기에는 장면 설정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있다. 이 장면을 집어넣기 위해 배경에 흐르는 스토리가 아무리 식상해도, 우리는 이미 여주인공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적을 추적하는 게임 모드에 들어와 있다. 게임이 선사하는 감각적 쾌감이 서사적 요구를 압도하면, 이제 내용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진다.
여름에 볼만한 시원한 액션, 전투적인 여성 캐릭터를 갈망해온 관객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물론 이건 ‘처음’에 주는 면죄부다. 다음번에 비슷한 영화가 나온다면 여성 경험과 심리를 이해하는 감독과 각본가의 작품이라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