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현실 한 스푼을 더한 이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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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현실 한 스푼을 더한 이갈리아

유희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이자벨 위페르 주연(미셸 역)의 영화 <엘르>(2017 국내 개봉, 폴 버호벤 감독)은 보는 사람의 기대를 여러 번 배신하는 영화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누군가에게는 통쾌할 이 ‘배반’은 어떤 면에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떠오르게 한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1977년 발표한 이 소설은 여성들이 사회를 이끄는 가모장제 세계를 그린다. 가부장적 질서를 뒤집은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가정주부’인 남자들을 배제한 자신들만의 클럽을 운영하는가 하면, 모험심이 필요한 직업을 독점한다. 결단, 도전, 지배가 그들의 일이다.

이갈리아의 면면은 현실을 모조리 미러링하고 있어서 세상 어딘가에 그런 세계가 정말 존재할 것 같은 개연성은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판타지적 세계관에 현실 감각을 좀 더해 보면? <엘르>의 파리는 이 질문에 대한 서늘하면서도 매력적인 답으로 보인다.

피해자가 아닌 여성의 이야기

영화는 가택 침입 강간 사건으로 시작하여 그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주된 줄기로 삼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일견 복수에 관한 이야기로, 동시에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우악스러운 폭행, 여자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와장창 깨지는 식기, 친근하기보다는 음산한 고양이 울음소리. 파리의 한적한 부촌을 배경으로 벌어진 범죄의 장면은 끔찍하고, 여자는 되살아나는 폭행의 기억 속에서 가상의 복수를 자행하지만 무력해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휴대전화로는 범인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스토킹 문자가 날아오는가 하면, 여자가 운영하는 게임 회사의 젊고 건방진 직원들은 여자의 얼굴을 씌운 캐릭터를 강간하는 영상을 만들어 공유한다.

그런데 영화는 범인을 찾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범인 찾기와 별 관련 없는 여자의 일상 면면이 자꾸 이야기를 침범한다. 그래서 영화의 초점은 복수가 아니라 여자 개인에게,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게 흩어진다. 그리고 솔직히, 주인공 ‘미셸’을 포함해 이 영화의 모든 여자들은 피해자와는 거리가 멀다.

여자는 사건 이후 공권력에 호소하기보다는 담담하게 자신을 보호할 장비를 갖추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여자의 단호함과 차분함이 관객을 가장 먼저 당혹게 한다. 여자는 이를 ‘과거에 경찰과 언론에 시달린 경험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언뜻 이 설명은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영화의 막바지에 경찰을 응대하는 여자의 태도에는 딱히 불안이라 부를 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는데, 요컨대 공권력과 언론에 대한 여자의 태도는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불신에 가깝다.

복수가 아닌 문제 해결의 이야기

이 영화는 복수에 관한 영화인가? 그보다는 어떤 여자가 문제‘들’에 대응하는 이야기, 다시 말해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관한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여자는 삶을 즐기고, 사업적이거나 가족적인 결정들을 주도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포식자다. 여자의 절제된 감정은 범죄나 이상심리의 징후가 아니라 ‘지배자’의 특성은 아닌가? 여자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차적인 일들’에는 감정을 아끼는 인물인 것이 아닐까? 다른 방향에서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폭력을 경험한 여자의 ‘평범하지 않은 반응’을 그리는 이 영화에 혹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면, 여자가 감정적으로 절제되어 있거나 태연하게 일상을 이어가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관객은 폭력의 결과 엉망이 된 피해자라는 외설적 장면을 기대하며 영화를 마주했다가, 그것이 좌절되어 불편해하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이런 ‘기대’는 피해자가 여성이 아니었더라도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했을까? 성별에 따라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감정의 종류, 감정의 강도, 감정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엘르>는 짜릿하게도 미세하지만 강력한 감정의 검열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력화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영화의 여자들에게서는 여성 인물들에게 흔히 귀속되는 감정 과잉이나 어떤 가벼움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에는 상투적인 캣파이트를 예상케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를테면 전남편의 애인인 헬렌과 주인공이 대면하는 장면, 친구이자 공동경영자인 안나에게 그녀의 남편과 바람을 피웠음을 고백하는 장면, 남편이 죽고 이사를 나가는 이웃 레베카와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헬렌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 친구의 전아내가 탐탁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게 대응한다. 안나는 친구와 싸우는 대신 타당하게도 남편과 싸운 후 결혼 관계를 정리한 후 되려 미셸과의 연대를 강화한다. 레베카는 남편의 죄를 대신 사과하지도 그렇다고 남편을 죽인 죄를 따지지도 않는다. 다만 남편의 행동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며 담담하게 고맙다고 말할 뿐이다. 이들은 남자들의 관계에 부속품으로 딸린 존재가 아니다.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자신들의 관계를 희생하지 않는다. 아들인 뱅상의 동거인인 조시도, 어머니인 이렌느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사람과 사귀고, 원하는 일을 한다. 이 영화의 여자들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결정하는 인물들이다. 만족스럽지 않은 관계나 사회적 취약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닥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겨냥해야 할 사람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성 호모 소셜

‘여성 캐릭터’에게 작동하는 단단한 상투성을 무너뜨리는 이 영화의 ‘여성 호모 소셜’은 허구적이지만 동시에 리얼하다. 이 영화의 세계 속에서 여자들은 강하고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남자들은 놀라울 만큼 미성숙하고, 눈치가 없고, 책임감이나 사회적 수완도 없다. 이런 단순한 이분법에 다소의 과장이 있다고 치더라도, <엘르>의 여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내게 여타의 ‘상투적인 여성 캐릭터’들보다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이미 현실 속의 여성들은 늘 삶의 다양한 장애물, 가족이나 연인처럼 사적 관계만이 아니라 직장과 사회 일반, 과거와 미래를 상대하며 자신의 삶을 장악하려고 애쓰고, 또 종종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그녀Elle’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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