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된 결정이 직업 능력의 핵심을 이루는 창작자나 전문직 종사자의 경우, ‘여성’이라는 라벨은 득일까, 실일까? 터놓고 말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많을 것 같긴 하다. 잃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너무 진저리치도록 잘 알 테니,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한나 아렌트 (2014,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바바라 수코바 주연) 미스 슬로운 (2017, 존 매든 감독, 제시카 차스테인 주연) <한나 아렌트>는 실존 인물인 성공한 여성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우슈비츠로 유대인을 이송하는 일의 총책임자였던) 아...
이자벨 위페르 주연(미셸 역)의 영화 <엘르>(2017 국내 개봉, 폴 버호벤 감독)은 보는 사람의 기대를 여러 번 배신하는 영화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누군가에게는 통쾌할 이 ‘배반’은 어떤 면에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떠오르게 한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1977년 발표한 이 소설은 여성들이 사회를 이끄는 가모장제 세계를 그린다. 가부장적 질서를 뒤집은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사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가정주부’인 남자들을 배제한 자신들만의 클럽을 운영하는가 하면, 모험심이 필요한 직업을 독점한다. 결단, 도전, 지배가 그들의 일이다. 이갈리아의 면면은 현실을 모조리 미러링하고 있어서 세상 어딘가에...
<악녀>(정병길 감독)는 2017년 연초부터 김혜수가 조직폭력배로 분한 <소중한 여인>(가제, 이안규 감독)과 더불어 김옥빈이 살인병기로 키워진 비밀요원 역을 맡은 여배우 원톱 액션 영화로 기대감을 모았던 영화다. 최근 몇 년간 빈번하게 지적되어 왔듯이, 국내 영화 가운데 여배우가 맘껏 놀 수 있는 작품은 턱없이 부족하다. 작년에 개봉한 여성 영화들이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흥행에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 탓에, 목마른 여성 관객들로서는 더 기다려온 영화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수년간 친밀함을 공유해온 사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쉽지 않다. 안다, 당신에게 악의는 없단 사실을. ‘사랑’과 ‘책임’이면 관계가 온전하게 안정되리라고 믿었으리란 것도. 사랑과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너무 쉽게 속단했음을, 우리 둘 다 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랑하고 책임을 지려면 우리는 동등해야 했다. 사랑하고 책임을 지려면 우리는 비슷한 만큼의 노동과 감정을 관계에 쏟아부어야 했다. 사랑해서, 정이 들어서, 믿어서 함께하기로 했던 것이므로, 이제 와서 터져 나온 이런 이야기가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다. 나의 입장에 서보려고, 나의 말을 이해해 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위안부 생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어폴로지>와 <눈길>은 모두 문제 해결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령에 접어든 생존자들이 더 이상 증언을 하거나 사과를 받을 수 없게 되기 이전에 이 문제를 제대로 매듭지어야 한다는 시급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눈길>은 허구적 서사의 형식을, <어폴로지>는 생존자들의 현재를 담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두 편의 영화는 생존자의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생존자’의 주체적인 모습에 주목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를 통해 두 영화는 생존자의 과거뿐만 아니라 사건이 기술되는 현재, 그리고 그 사연을 듣는 청자의 반응과 상호작용이라는 복합적인 양상을 담아낸다. 이제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사건을 재생산하는 대신, 기록, 기억, 상처와 연대, 과거와 현재, 국민과 개인 등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나눠야 할 때다. 어폴로지(2016) [다큐멘터리, 캐나다] 2017. 3. 16 개봉 티파니 쉥 감독 길원옥, 차오, 아델라 주연 당신은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이미 많이 이야기된, 그래서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