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섯, 마흔 넷
올해 시청률과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이 시끄러웠던 드라마를 꼽는다면 tvN <나의 아저씨>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방영되기 전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트위터에서는 스물여섯살 아이유와 마흔네살 이선균이 주인공을 맡고, 제목이 '나의 아저씨'라는 사실만으로도 즉각 비판이 일었다. 왜 아니겠는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장르물이 아닌 한국 드라마에서 대개 남녀 주인공은 로맨스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며, <나의 아저씨>의 경우 그 둘의 나이차가 글로 쓰면서도 다시 한번 놀랄 정도인 열여덟 살이다. 아무튼 누군가는 이 작품을 비판하더라도 보고 비판해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럴 필요 없이 바로 걸러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전자를 택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나의 아저씨>의 기획의도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 아저씨가 있다. 우러러 볼만한 경력도, 부러워할 만한 능력도 없다. 그저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그속엔 아홉살 소년의 순수성이 있고, 타성에 물들지 않은 날카로움도 있다.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따뜻함과 우직함도 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간의 매력'을 보여주는 아저씨. 그를 보면, 맑은 물에 눈과 귀를 씻은 느낌이 든다. 길거리에 넘쳐나는 흔하디흔한 아저씨들. 허름하고 한심하게 보이던 그들이, 사랑스러워 죽을 것이다. 눈물 나게 낄낄대며 보다가, 끝내 펑펑 울 것이다."
아주 아주 가끔가다 이런 아저씨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픽션을 현실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스물몇 살 여성들에게 가장 불쾌할 존재일 아저씨들로부터 인간의 매력을 발견하거나 사랑스러워죽는 것이 가능한지, 기획의도에서부터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나의 아저씨>를 보기 시작했다.
제작진이 밝힌대로 주인공인 45세 아저씨 박동훈(이선균)은 평범하다.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다니며 그럭저럭 괜찮게 자리를 보전하고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남들은 일탈 한번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재미 없고 불쌍한 사람이라 말하고, 자신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는 듯 하다. (도대체 왜?) 그런 '아저씨' 눈에 같은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21세 여성 이지안(아이유)이 발견된다. 문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해서 커피믹스로 식사를 떼우고 제대로 된 옷이나 신발조차 없으며, 오래 전 진 빚 때문에 사채업자에게 늘상 폭력을 당하며 살아가는 그를, 박동훈은 불쌍히 여기고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한다.
히어로 아저씨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나의 아저씨>는 평범하고 심심하게 살아가던 중년 남성의 삶에 이벤트가 생기는 이야기이며, 그 이벤트를 통해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던 중년 남성이 모두의 주목을 받는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을 구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도 구하는 이야기, 좋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박동훈은 분명 나쁘지 않은, 선의를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그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작품은 이지안을 어떻게 그리는가? 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의 고난에 반복적으로 시달리게 만든다.
게다가 동훈은 선의일 뿐인데, 지안이 동훈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접근한다는 식의 장면과 전개도 여러번 등장한다. 미투 선언이 한창이었던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이런 설정들은 악의로 비춰질 지경이다. <나의 아저씨> 제작진은 동훈과 지안의 관계가 연인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임을 여러 번 강조했지만 극 중에서 둘이 나누는 감정은 사랑에 가까우며, 표면적으로만 연인이 되지 않음으로써 동훈을 결백하게 만드는 알리바이가 된다.
이 드라마에서 나는,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지않은 중년 남성들의 욕망을 읽는다. 이것은 한때 불었던 '영포티' 열풍과도 맞닿아 있다. 무례한 아저씨들을 일컫는 '개저씨'라는 호칭은 사라진 대신, 여전히 젊게 사는 중년(그 중에서도 주로 남성)을 뜻하는 '영포티'가 그 자리를 대신했던 것처럼 아직 자신은 젊고, 어린 여성과 소통할 수 있으며,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이 <나의 아저씨> 같은 드라마를 만들고 또 보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는 특정 성별이나 계층의 판타지만을 대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런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아저씨'들을 미화하고 젊은 여성의 고통을 반복해서 전시하며, 젊은 여성이 '아저씨'들의 바운더리에 들어감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2018년에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이것이 왜 나를 포함한 어떤 여성들에게는 나쁜 작품일 수밖에 없는지 말해야 한다.
나쁜 작품일 수밖에 없는 이유
이 흐름에서 같이 살펴봐야 할 드라마는 tvN <미스터 션샤인>이다. 이 드라마 역시 방영 전부터 스물아홉살 김태리와 마흔아홉살 이병헌의 나이차, 그리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병헌의 그 사건 때문에 논란이 됐다. 일제 강점기 이전의 시대상을 다룬 이 작품에서 사대부 영애인 고애신(김태리)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앞서나가는 여성이다. 당시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총 쏘는 법을 배우고, 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나는 실제 역사 속에서 묻힌 여성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일의 중요함과는 별개로, 여성주의적으로 의미가 있는 여성을 그려낼 때 현재가 아닌 과거의 배경을 빌려오는 설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의 상황에서 조금만 벗어나게 그려도 상당히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미스터 션샤인> 또한 그런 트릭을 쓴 작품 중 하나였고, 고애신은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치열한 세 명의 남성들(그게 멋있게 비춰졌는지와는 별개로) 사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성으로 남았다. 김태리라는 배우가 가진 힘이나 <아가씨> 등 앞선 필모로 쌓아왔던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더더욱 존재감 없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이병헌은 또 다시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설 기회를 얻었다.
이제 남녀 주인공의 큰 나이차는 시청자들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종의 트렌드가 돼버린 걸까? (물론 그걸 받아들일 수 없는 시청자들은 진작 한국 TV 드라마를 포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2018년 1월부터 3월까지 방영된 KBS <라디오 로맨스>에서는 실제나이 스무살인 김소현과 서른살 윤두준이, 11월 26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JTBC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에서는 스무살 김유정과 서른두살 윤균상이 주인공을 맡았다. 7월부터 9월까지 방송된 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처럼 사고로 인해 몸은 서른이지만 정신 연령은 열일곱에 멈춰버린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서툴고 귀여운 행동을 정당화하는 작품도 있었다. (사실 이 드라마 속 '서른이지만 열일곱' 우서리의 모습은 이 역할을 맡은 배우 신혜선과 실제 열일곱 여성들에게 실례일 정도로 유아적이었다.)
이런 흐름의 다른 한쪽에는 '무해한 이미지'로 일컬어지는 젊은 남성 배우들이 있다. 2017년 SBS <사랑의 온도>로 인기를 얻고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주인공을 맡은 양세종,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정해인, tvN <남자친구>의 박보검 같은 배우들은 전혀 다른 스타일임에도 '무해한 남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이며 주목할만한 트렌드로 계속해서 회자되고 점점 더 큰 인기를 얻는다. 그 나이대 여성 배우들의 집단적인 약진이나 그들을 설명하는 표현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느리고 늙었다
2018년의 엔터테인먼트를 결산해보는 이번 기획에서 다른 분야들도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웠지만, 드라마 업계는 유난히 더 느리고 늙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성폭력 가해자였던 남성 배우들이 해외 수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빠르게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컴백하고, 현재 방송 중인 SBS <황후의 품격>처럼 여성혐오와 폭력을 눈요깃거리로 이용하는 작품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며, 작품 바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있다. 여자 주인공이 회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예전 드라마와는 달리, 일이 여성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남자친구>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같은 작품들도 나오지만 결국 이성애 기반 연애와 여성의 삶을 떨어뜨려 그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갈 길이 멀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시대에 너무 많은 것이 바뀌지 않은 채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산업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뛰어난 연기로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가끔 놀라곤 한다. JTBC <미스티>에서 김남주는 야망을 갖고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착하지 않은 여자 고혜란을 정확히 묘사했으며, 김희선은 2017년 방영된 JTBC <품위있는 그녀>에 이어 올해 tvN <나인룸>에서도 그 무엇보다 다른 여성과의 관계가 중요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JTBC <SKY 캐슬>은 다양한 욕망을 가진 중년 여성들을 주인공의 자리로 불러왔다. 이는 곧 아주 아주 느리기는 해도 여성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해보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으며,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여성 배우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아마도 2018년의 빛나는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김남주의 '더 서울어워즈' 수상 소감 일부를 떠올려본다. "오늘 꼭 이 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드라마가 막 마지막 방송하고 김혜수 선배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많은 격려와 칭찬 해주셨는데 저도 선배님처럼 좋은 선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드라마 바깥의 이런 관계와 이야기들을, 드라마 안에서도 더 많이 보고 싶다. 그리고 내년에는 좋았던 것에 대해 더 큰소리로,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