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큰 판은 여자가: 2018년, 여성과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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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큰 판은 여자가: 2018년, 여성과 예능

윤이나

더 나은 여성의 삶을 위한 콘텐츠 플랫폼 <헤이메이트>가 <핀치>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2018년을 결산하는 다섯 편의 글을 연재합니다. <헤이메이트>의 윤이나, 황효진이라는 필터를 거쳐 올해의 엔터테인먼트 지형을 돌아봅니다. 마지막 순서는 올해의 예능과 여성.

 

한 해를 결산하며 한국 예능에 대해서 말할 때 몇 년째 인용 중인 장면이 있다. 2015년 연말 <무한도전>의 예능총회. 남자들이 가득한 스튜디오에 고독하게 김숙이 앉아있다. 이경규, 유재석을 필두로 한 수많은 남자 예능인들로도 모자라 김구라는 아들까지 데리고 나왔는데 함께 나왔던 유일한 여성 예능인인 박나래는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전문가로 부른 평론가 역시 셋 다 남자다. 겨우 기회를 잡은 김숙이 말한다. 2015년 예능의 가장 큰 문제점이자 특징은 “남자 판”이었다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안건은 어물쩡 다음으로 넘어간다.

'남자 판'의 균열

짐짓 모른 척하고 있었거나, 알아챌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남자 판의 균열은 그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김숙이 바로 그해인 2015년, 송은이와 함께 시작한 팟캐스트 ‘비밀보장’이 3년 뒤 가장 화제성이 높은 프로그램 중 하나를 방송사와 공동기획하는 콘텐츠랩 비보가 됐다. 만약에 2018년 예능총회를 한다면 어떨까? 여전히 방송국에서는 지리멸렬한 남자 예능인들을 잔뜩 불러모으겠지만 올해만큼은 김숙 뿐 아니라 2015년에는 몇마디 하지도 못했던 박나래를, 당시에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송은이를, 이영자를 빼고 예능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김숙이 일이 없던 시절의 송은이가 적성검사를 했다는 말을 한 일이 있다. 송은이의 적성검사 결과는 사무직이었다. 엑셀을 배웠고, 목공을 배웠고, 편집을 배웠다. 남자 예능인들이 물의를 일으키고도 다시 복귀하고 몇 개의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프로그램이 끊긴 송은이는, 팟캐스트를 시작했고, 웹 예능을 만들었고, 힘들었던 시절의 경험으로 회사까지 차려 스스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예능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됐다. 송은이는 올해를 셀럽파이브 활동으로 시작했다. 셀럽파이브의 웹 예능 제목은 <판벌려>다. 2017년 한 해 동안 짜고 있는 새로운 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송은이는, 아예 판을 더 크게 벌이는 것으로 새해를 열었다.

판벌려

송은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 예능인들을 위한 판을 짜고 있다는 것은 그의 행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지난해 가장 빠르게 성공한 예능이었음에도 가장 빠르게 사라져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영수증>에서 어떤 교훈을 얻은 것은 아닐까? 송은이는 올해 비보의 이름을 걸고 시작한 가장 큰 두개의 프로젝트를 후배들을 끌어주고(‘셀럽파이브’), 선배들과 함께가는(<밥블레스유>) 방식으로 진행해나가는 중이다. 명백한 남자 예능인 중심의 라인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없었다면, 새로운 판을 짜고 거기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들이 같이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송은이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힘들었던 시절의 예능총회에서 김숙이 대충 주워섬기며 말했던 미래인 “남녀 화합의 장” 같은 것이 사실은 필요없다는 것을 말이다. 

<밥블레스유> 타이틀. 사진제공 CJ E&M

거기에 송은이는 판을 덧댄다. 지금 판이 벌어졌고 이 판에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면, 이 판을 더 큰 판으로 옮겨야한다. 모두가 작은 판을 벌이는 일도 의미가 있고, 누군가는 그런 방식으로 발견되겠지만 그건 송은이의 방식이 아니다. <밥블레스유>는 그렇게 웹에서 올리브 채널로 옮겨갔다. 이영자라는 걸출한 예능인이 놀아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의 재능이 어떤 플랫폼에서 더 돋보이는지 정확하게 판단한 결정이다. 송은이는 여성 예능인 모두가 송은이가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지금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 송은이가 이영자와 함께 <전지적 참견 시점>을 시작한 것도 올해 예능의 최고 히트 상품 중 하나가 만들어지는 발판이 됐다. 한 시절을 풍미했고 여전한 저력을 가진 이영자는, 송은이의 아낌없는 지지 속에 ‘아픈 손가락’ 기흥 휴게소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휴게소를 맛집으로 만들어내는 기념비적인 예능 업적을 세웠다. 그가 <밥블레스유>에서 송은이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고 한 것은 의미가 깊다. 스쳐지나가는 그 말에 한껏 의미부여를 해보자면 이영자의 유산은 온갖 부침을 겪고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비혼 여성 예능인의 유산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길을 낼게

그리고 박미선은 올해에도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밥블레스유>가 이영자의 수영 장면을 포함해 의미있는 순간들을 몇번이나 만들어냈지만, 나는 올해 예능에서 단 한 장면을 뽑으라면 <해피투게더>로 귀환한 박미선이 이 말을 던진 순간을 1위로 올릴 것이다. “그것(연극 <홈쇼핑 주식회사>) 때문에 여기 나온 거예요. 뭐하러 <해피투게더>에 나오겠어요?” 제작진은 CG와 자막으로 허겁지겁 찰나의 침묵을 채우려고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말이 이제 숨기지도 않으려는 남자 예능인들 사이의 연줄로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두를 정확하게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박미선이 툭 던져놓은 이 한 마디는 단순히 3년 전 하차에 대한 농담 만은 아니다. 박미선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그 하차를 기점으로 여성 예능인의 입지가 눈에 띄게 좁아졌음을 생각한다면 박미선의 말은 더 여러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박미선은 <해피투게더> 이후에 오히려 더 단단한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갔다. <까칠남녀>로 단독 진행자로서의 역량을 펼쳤고, 연극 <홈쇼핑 주식회사>는 대학로에서 ‘드립걸즈’로 활약하던 후배 여성 예능인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정규 편성된 <거리의 만찬>에서는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여성 예능인의 또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길의 맨 앞에 서서 박미선은 말한다.

내가 앞장 설게, 누가 따라올래?

막막한 벌판에, 나무로 온통 가로막힌 것처럼 보이는 숲에, 길은 그렇게 나기 시작하는 법이다.

바뀌려 들지 않는 판,
바꾸려 힘 합치는 여성

다시 2018년의 예능총회로 돌아가보자. 전체적으로 봤을 때 2018년의 예능은 이제 대중들마저 서서히 질려가고 있음을 모른척 하며 연예인들 서로를 관찰하고, 가족들까지 관찰하며 이성애 연애와 결혼을 권하고, 그게 아니라면 한국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 요리를 만들거나 아니면 먹거나, 그것도 아니면 외국인들이 여행을 하면서 한국음식을 먹거나 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자 4인 이상이 모여 의미있는 말을 하는 척 하거나, 그런 척을 하는 것마저 포기한 방송 역시 하나의 트렌드다. (이런 의미에서 <알쓸신잡>과 <아는 형님> 사이는 그리 멀지 않다.) 그리고 화제성이 조금만 있으면 일단 시청률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판이 바뀌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몇 뛰어난 개인에 의해 판도가 바뀌기에는 너무 많은 자본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것을, 예능인들도 시청자들도 안다. 그런데도 그런 판이 조금씩이나마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은, 거기서 여성들이 힘을 합치고 서로를 밀고 끌어주며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또 얼마나 벅차고 즐거운가. 왜냐하면 대한민국 사회라는 판 안에서 여성들 또한 그렇게 가야하기 때문이다. 앞서서 가는 여성을 따라가면서 그가 지나온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여성이 해내는 일을 보고,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면서.

큰 판은 여자가 짠다

지난 11월, 셀럽파이브는 지니뮤직어워드에서 신인상 격인 올해의 발견 상을 수상했다. 김신영은 소감의 맨 마지막에 “좋아서 하는 일을 더 좋게 만들어주신 송선배” 송은이에게 영광을 돌렸다. 박미선만이 꾸준하게 시상식에 참여하는 유일한 여성 예능인이었던 시절은 지나갔다. 2018년은 바로 이 여성 예능인들의 해였다. 연말에는 이들이 서로에게 더 많은 감사를,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백상예술대상의 여성 예능인 상을 받은 송은이가 빠른 시일 내에 시상식을 진행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송은이는 여성 둘이 진행을 하는 장면을 보고 싶고 그날이 오면 박수를 치겠다고 했지만, 그가 바로 그 자리에서 영혼의 짝인 김숙과 시상식을 진행하면 왜 안되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여성 예능인이 상을 받고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고, 그들처럼 되어야만 한다. 그때는 지겨운 ‘남자 판’ 인용을 대신해, 여성 예능인 활약의 시작점을 알리는 바로 이 순간에 대한 인용으로 예능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올 새 판, 그리고 큰 판은 여자가 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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