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정치에 꽂혔다는 솔비에게 MC들이 추궁하듯 터키 쿠데타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솔비는 "내용은 알고 있지만 어쨌든 쿠데타는 나쁜거니까."라고 답한다. 그의 답변에 MC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박장대소 하며 "그건 좋은거, 그건 나쁜거, 이렇게 알고 있구나!"라고 말한다. 솔비는 당당하게 반문한다. “쿠데타가 좋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장면 둘.
2016년 9월 28일, ‘라디오 스타 - 걸크러쉬 유발자들 특집’.MC들이 화요비의 전 애인인 슬리피를 언급하며 ‘S군’이라는 표현을 쓴다. 화요비는 이에 “왜 남자는 S라고 얘기하냐”며 “(슬리피가 나왔을 때는) 내 이름은 H라고 안 하고, 사진까지 띄웠으면서. 왜 그렇게 표현해주는 거에요?”라고 항의한다. 뿐만 아니라 자꾸만 삿대질을 하는 김구라에게 “볼펜으로 손가락질 좀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장면 셋.
2016년 10월 4일에 방송된 ‘비디오 스타 - 글로벌 어벤저스 뇌섹남녀 특집’.
MC들이 신아영에게 하버드 대학에는 어떻게 입학하게 된 것이냐고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한번 넣어보자, 하고 수시지원을 했는데 됐다.” 물론 '비디오스타'는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았다. 신아영이 골반을 자랑하도록 만들고, 후배 스포츠 아나운서와의 기싸움을 연출하기도 한다.
솔비와 화요비, 그리고 신아영은 당당하다. 상대방에게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부족하다고 인정한다. 자신의 뛰어남을 과장해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도 지녔다. 솔비 그리고 화요비는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화요비는 명실공히 R&B의 여제이면서 유명 작사가로도 활동중이다. 뿐만아니라 가수 솔비는 개인 전시회를 여는 아티스트로 성장했고, 실종아동찾기 '파인드 프로젝트'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신아영은 하버드를 졸업한 후, 스포츠 아나운서로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발히 활동중이다.
그러나 <라디오 스타>가 솔비에게 부여한 수식어는 “예측불가 백치미”였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자막으로 ‘순수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화요비에게는 유치원생 복장과 하얀 콧물 그림을 합성한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어리숙한 연기’를 할 때에 하는 분장이다.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서인영의 무대를 앞두고 토크가 다른 길로 새자 “노래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지적했더니 벌어진 일이다.
<라디오 스타>가 가장 최근 동일한 이미지를 합성한 것은 은지원이 출연한 6월 1일 방영분에서였다. 이러한 효과를 사용한 것이 화요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목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은지원에게 합성된 이미지에 콧물 그림은 없었고, 굳이 유치원생 이미지를 합성한 이유도 그가 스스로 ‘영어실력이 유치원 수준’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콧물 그림이 합성되었던 것 역시 스스로 '모르겠습니다'라고 시인했을 때 였다.
신아영은 어떤가. 하버드 출신의 아나운서는 예능 <더 지니어스 : 블랙가넷>에서 애교를 부리거나 다른 출연자에게 징징대는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그는 맥락 없이 깔깔대며 웃고,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고는 한다. 외모만 뛰어나고 실질적으로 게임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꽃병풍’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별명이 붙게 되기까지 그를 백치미와 푼수끼가 넘치는 캐릭터로 몰아간 제작진의 의도가 없었다고는 하지 못할 테다.
'캐릭터 잡기'로 둔갑하는
여성 후려치기 전략
미디어는 여성들을 죄다 비슷한 캐릭터로 만들어 소비한다. 그들이 어떤 다른 능력을 가졌는지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백치미’나 ‘4차원’같은 수식어가 대표적이다. 당장 백치미만 검색해도 수천 개의 기사가 나온다. 그 중 대부분이 백치미라는 단어를 연예인의 독특한 캐릭터나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백치의 사전적 정의는 ‘뇌에 질환이 있어 지능이 낮은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일종의 혐오 단어인 셈이다. 혐오 단어에 ‘아름다울 미’를 붙인다고 칭찬이 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는 200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한창 유행했던 표현이다. 약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백치미’나 ‘4차원’ 등의 수식어로만 여성을 묘사해버리는 것은 참으로 낡고 안이한 수법이다.
이를 대체한답시고 새로 만들어진 단어도 있다. 바로 ‘뇌순녀’다. 2015년 말, <무한도전>에서 ‘바보전쟁, 순수의 시대’ 특집을 진행하던 당시 뇌가 순수한 여자를 줄여 말하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 발짝도 진보한 것은 없다. 여전히 이는 여성을 예쁘지만 멍청한 인간으로 치부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해당 연예인이 아무리 자신의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확고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약간의 맹한 구석을 보이는 순간 그는 ‘백치미’, ‘뇌순녀’로 둔갑해버린다.
“음악 이야기를 끝낸 솔비는 영락없는 ‘뇌순녀’였다.”
한 연예매체가 솔비와의 인터뷰 기사에 적은 문장이다. 이처럼 ‘백치’ 프레임을 뒤집어 쓰는 순간 여성의 능력은 당연한 것처럼 후려치기 당한다. 예쁘고, 능력도 있으며, 자신만의 신념도 확고한 여성을 어리숙해 보이는 말투나 특정 분야에 대한 상식 부재 등을 꼬투리 잡아 만만한 여자로 만드는 전략. 그리하여 뇌순녀나 백치미 여성은 언제든 남성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귀여움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예쁘지만 멍청한 여자’를 매력적으로 포장하여 소비하는 것이 예능 캐릭터를 구축하는 효과적 방법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I.O.I의 소혜를 보라. <프로듀스 101>에서 성장 서사의 주인공이었던 김소혜는 <스타쇼 360>으로 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리포터가 된다. 그는 MC들이 대본에 없는 질문을 던지면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 하고, 그들의 요구도 알아듣지 못하며 시종일관 맹한 표정을 짓는다.
또 어딘가에서는 멀쩡히 서울대를 졸업하고 멘사 회원으로 등록된 여배우가 자신이 ‘뇌순녀’임을 어필하게 된다. 한 예능 프로그램 제작 발표회에서 배우 지주연은 “서울대 출신, 멘사 회원 수식어가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평소엔 ‘뇌순녀’임을 굳이 강조한다. 물론 <코드 - 비밀의 방>이 심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지는 기대감이 부담스럽다는 맥락에서 등장한 표현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 행간에 숨은 유해함은 부정할 수 없다. 바로 얼마 뒤, 예능 프로그램 <비디오 스타>에 등장해 “실생활은 뇌순녀에 가깝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또 다시 자신의 똑똑함을 부정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백치미가 뇌순녀로 대체되었듯이, 또 뇌순녀가 어떤 단어로 변모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수식어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여성의 능력을 폄훼하는 효과를 깨닫지 못하는 순간, 미디어 속의 여성은 언제나 ‘예쁘지만 멍청한 여자’로 후려치기 당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