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위한 IT 기기는 없다

알다IT

여성을 위한 IT 기기는 없다

김다정

“여성분들은 이런 색상 좋아하시죠?”

아이폰을 사러 가면 매장 직원이 대뜸 내미는 것은 로즈골드 색상이다. 영상 편집용 노트북을 사기 위해 검색창을 뒤적이고 있으면 옆에 다가온 남자 선배는 조언이랍시고 한마디를 던진다. 

“야, 니가 그렇게 고사양 노트북을 쓸 필요가 있어? 여자들한테는 그냥 가벼운 게 짱이야.”

IT 제품에 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조차 여성은 온갖 여성혐오를 당한다. ‘여성을 위한 IT 제품’을 추천하겠다며 늘어놓는 대표적인 문구들을 한 자리에 모아 봤다.

노트북

1) 작고 가볍기만 하면 되잖아

‘여대생을 위한 노트북 추천’ 기사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은 바로 ‘가벼운 무게’와 ‘작은 크기’다. 

하지만, 노트북을 사는 누구나 같은 사양이라면 비교적 가벼운 노트북을 선호한다. 같은 사양이라면 말이다. 혹은 노트북을 항상 들고 다녀야 하는 사람의 경우, 가벼운 무게가 제품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 추천하는 노트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핸드백’에도 들어갈 만한 작은 크기나 가벼운 무게가 다른 어떤 스펙보다 강조된다. 사실 노트북을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나?

“특히 ‘여성’에게는 더하다. 크고 무거운 걸 들고 다니긴 싫고, 아는 게 많이 없으니 무엇을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 - smart PC사랑
“여자 새내기 대학생들에겐 멋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각종 화장품, 거울, 스마트폰, 지갑을 가방에 넣고 핸드백에 넣을 수 없는 전공 책은 안아든다.” - smart PC사랑
“여대생들이 토드백에 넣고 다니기에는 좀 무겁다.” - IT동아
“여대생은 핸드백에 '쏙' 삼성 아티브 북 M” - 메트로신문

2) 핑크색이면 더 좋지?

뿐만 아니다. 블랙이나 실버같은 기본적 색상 이외에 다양한 컬러 선택지가 있는 노트북도 흔히 ‘여성을 위한 노트북’ 따위로 포장되곤 한다. 색상, 디자인, 물론 중요하다. 누가 뭐래? 남성들이 미적 취향 하나 없이 그저 검정색, 혹은 실버를 고르는 둔함마저도 왜 여성을 후려치는 요소로 작용한단 말인가?

“컬러도 다양해 예쁜 노트북을 찾는 여대생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 IT조선
“빨강, 노랑 등 색상만 봐서는 여성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만한 노트북인데, 무게가 역시 걸림돌이다.” - IT동아

3) 너네는 사양 안 따지잖아

여대생을 위한 노트북으로 꼽히는 기기의 사양은 대부분 문서작업이나 인터넷 서핑 정도가 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남학생을 위한 노트북은 게이밍 등이 가능한 고사양의 제품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을 즐기는 여성이나, 프로그래밍 혹은 사진,영상 편집 작업을 하는 여성이라는 경우의 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양, 그렇게 말이다.

“남학생들은 대부분 좋은 사양의 PC나 노트북을 원한다. 대학에 막 입학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멋내기인 상큼한 새내기 여대생에게 묵직한 노트북 가방은 어울리지 않는다.” - AVING

카메라

1) 셀카 찍으려고 카메라 사시는 거죠?

‘여성을 위한 노트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가 가벼운 무게와 예쁜 색깔이라면, ‘여성을 위한 카메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회전 액정’이다. 왜냐고? 여성이라면 당연히 셀카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하기 때문이다. 물론, 셀카를 위한 ‘피부 보정’ 역시 강조되는 기능 중 하나다.

“셀카 찍기를 즐기는 예비 여대생이라면 피부 보정 기능과 초소형 미러리스 카메라” - CCTV뉴스
“셀카 찍는 것을 즐기는 예비 여대생에게는 후지필름 미러리스 카메라 X-A2를 추천한다.” - OSEN
“주 타깃층은 20대 여성층. 캐논 미러리스 최초로 '예쁜 피부 효과 기능'을 넣었다.” - 베타뉴스

저기, 셀카는 그냥 핸드폰 전면 카메라가 최고입니다. 이들은 타겟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다. 

2) 그리고 셀카 찍어서 페북에 올리실 거죠?

개그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흉내낸답시고 음식 사진을 찍어 SNS에 공유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위한 카메라’에 와이파이 등을 이용한 무선 전송 기능이 강조되지 않을리가 없다.

“간편하게 들고 다니며 사진을 SNS로 공유하는 여성 사용자에게 잘 어울린다.” - 베타뉴스
“SNS를 주로 사용하는 2030 여성에게 가장 어울리는 카메라.” - 베타뉴스

3) 여대생은 DSLR 못 쓰잖아

심지어 여성에게 추천하는 카메라 중에는 DSLR을 찾아보기 힘들다. 전부 하이엔드 디지털 카메라나 초소형 미러리스 일색이다. 그나마 가끔씩 등장하는 DSLR도 여성에게 추천하는 모델은 고급기가 아닌 보급형 모델이다. 왜냐고? 여성은 조작이 어려운 카메라는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쉬운 사용자 인터페이스 등을 갖춰 타사와 견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 여성을 위한 카메라로 각광받는다.” - 키뉴스
“미러리스는 '무겁고 조작이 어려운' DSLR의 단점을 보완해 한층 여성에게 가깝고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 키뉴스
“액정 터치가 가능해 스마트폰에 익숙한 여성사용자도 쉽게 조작할 수 있다.” - 베타뉴스
“캐논 EOS X8i는 보급형 DSLR 카메라로 여성 사용자들에게 어울린다.” - IT조선

‘여성을 위한 카메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니콘의 미러리스 J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꾸준히 “여심을 사로잡”겠다는 의지로 출시되고 있으며, 가장 최근 기종은 J5다. 온라인 구매 기준으로 30만원 중반대다. 이 기종이 주력으로 강조하는 요소는 ‘콤팩트한 디자인’, ‘셀프촬영을 위한 틸트모니터/뷰티모드’, 그리고 ‘와이파이 원격 촬영 및 전송’.

요즘 대부분의 카메라가 틸트 모니터와 무선 와이파이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대단히 뛰어난 점이 없는 미러리스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카메라 화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센서의 크기가 단 1인치로, 보통 미러리스에 비해서도 작은 편이다. 하도 작은 센서 크기 때문에 심지어 ‘센서리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도통 어디가 ‘여성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은 저렴한 카메라일 뿐인데.

헤드폰도, 내비게이션도.

이뿐이랴. 여성 취향 저격 헤드폰을 추천하는 기사에서는 ‘여성이 바라는 것은 웅장한 사운드만이 아니’라는 표현을, 네비게이션을 추천하는 글에서는 당당하게 ‘편의상’ 김여사 라는 혐오 단어를 사용하겠다는 선언을 마주쳐야만 한다.

“사운드에 일가견이 있는 남성들은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자 여친에게 고가의 헤드폰을 선물하기도 하죠. 하지만 여친이 바라는 건 웅장한 사운드만은 아니라는 사실. ... 이 제품은 꽃무늬부터 심플한 블랙까지 4가지 칼라로 복고풍 디자인에 여성을 겨냥한 디자인이 인상적인데요.” - 동아사이언스

“이번에는 ‘김여사’로 대표되는 초보운전자들을 위한 차량용 내비게이션 구매 가이드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다. 물론, 김여사가 아닌 박여사, 혹은 최서방이 그 대상일 수도 있지만 편의상 여기선 그 호칭을 김여사로 통일한다.” - IT동아

여성은 고작 IT 기기를 하나 살 때에도 온갖 혐오 표현과 편견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절망적이다. 크게 자랑할만한 성능이 없는 제품을 편견에 휩싸인 판단으로 여성을 위한 것으로 수식해 홍보하는 세상에서 여자를 위한 IT기기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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