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언박싱 1. 제시부터 강부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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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언박싱 1. 제시부터 강부자까지

이자연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TV 언박싱>은 매주 금요일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시사 등 다양한 TV 콘텐츠를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다룹니다.

 그녀를 낭비하는 법

어떤 여자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작은 섬에서 태어난 여자는 바다와 가까운 삶을 살았다. 운동 신경이 퍽 좋아서 물 속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법을, 팔과 다리를 부리는 법을 쉽게 익혔다. 수영에 재능을 타고났는지 그 뒤로 도 대회에 출전해서 상도 몇 번 탔다. 그렇지만 그녀는 수영선수가 되지 않았다. 뭍으로 나온 그녀는 몇 해 뒤에 자신의 성량이 무척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목소리도 고왔고, 높은 옥타브도 곧잘 따라갔다. 고등학교 선생님은 그녀에게 성악을 해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악가가 되지 않았다. 쉽게 예상했겠지만 이건 나의 엄마의 얘기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내가 그녀의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에 통탄했다. 수영 선수가 될 수 있었고, 성악가가 될 수 있었던 무수한 순간들이 아까워 속이 타올랐다.

우리집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섬세한 까닭에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긴 팔다리로 농구선수를 꿈꾸었던, 우주와 기계에 무한한 호기심을 품었던 엄마들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마치 집집마다 태몽이나 가보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씩 있듯, 채 다 이루지 못한 여성들의 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네들의 자식들도 딱 나만큼 놀라겠지. “엄마가 성악을? 엄마가?” 돌이켜 보면 조금 이상하다.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삶을 일상의 미덕인 것처럼 가르치는 나라에서 여성들을 이토록 낭비하다니. 왜 수많은 여자들은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까.

그놈의 ‘색 다른 매력’

<나 혼자 산다>는 2017년과 2018년, 각각 ‘올해의 예능 프로그램상’ 수상과 동시에 MBC 방송연예대상의 대상 후보를 배출하면서 명실상부한 MBC 대표 프로그램이 되었다. 오랜 공백을 가졌던 연예인들이 <나 혼자 산다>를 통해 컴백을 알리기도 했고,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드물던 배우나 모델의 자연스러운 모습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3월 22일, 프로그램에 랩퍼 제시가 출연했다. 평소 화통한 성격으로 알려진 만큼 제시는 시원시원한 말투와 행동으로 남성 패널들을 호령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판단이 들 때 무시하지 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질문에서 답답한 기색이 들면 패널들에게 마저 계속 보라는 핀잔을 주기도 했다. 누군가의 말 따나, 그녀는 ‘센 언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해당 회차를 홍보하는 미리 보기의 내용은 이렇다.

무지개 라이브 - 제시. 카리스마 만렙! '쎈 언니' 제시가 무지개 라이브에 떴다! 등장부터 스튜디오를 발칵 뒤집어 놓은 힙합 여전사! 꼬질꼬질한 양말로 하루를 시작해~ 화끈한 한식 먹방도 모자라, 영양제 폭식(?)까지?! 애교뽀짝 제시의 허당美 넘치는 반전 라이프 전격 공개

그런데 영 이상하다. 아무래도 제시셀프 자체를 비춰준다기 보다는,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주고 싶은 제시를 만들어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제시가 진실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무지개 라이브는 무척 의미가 있었다. 남성 연예인들을 휘어 잡는 그녀 조차 남자판인 힙합씬에 낄 자리가 없다는 어려움을 토로했고, 인생이 즐겁지 않았던 시절을 얘기했으며, 세 보이는 이미지와 주변 시선도 전했다. 게다가 유럽 투어 동안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이끌어가면서 자기 분야에서 얼마나 출중한 능력을 가졌는지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 혼자 산다>에게 이건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그보다는 그녀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때마다 주변인들은 한 마디씩 던질 뿐이다. “오, 애교가 많네!”

심지어 제시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던 헨리는 그녀의 출연에 대해 이런 말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실제 누나 성격을 아는데, 부드럽고 애교 많고 이런 걸 사람들이 다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드디어 사람들이 보게 된 것 같아서 기뻐요."

제시의 어느 모습에 무게를 더 두어야만 했을까. 그녀의 진실된 고백일까, 아니면 콧소리 가득한 장면에 애교라는 명칭을 붙이는 일일까. 애초에 남성의 세계에서 용납하지 않는 ‘센 누나’라는 명칭은 진작 사라지고, 그 뒤에 남은 ‘센 언니’ 이름표만 그녀에게 붙여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다면성을 가리우고, ‘세다’라는 말로만 퉁친 건 과연 누굴까. 그리고 <나 혼자 산다>는 이 질문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까?

그놈의 테스트

3월 29일,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가 돌아왔다. 새로운 게스트 등장을 비롯해서 기부 시스템 도입과 널찍한 스튜디오 등 이전과는 색다른 변화를 주기도 했다. 이번 1회에는 정형돈과 김풍, 셔누 등이 출연했다. 그리고 여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등장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반가운 얼굴, 강부자였다. 그녀는 1962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해서 올해 78세가 되기까지 긴 시간 동안 우리의 안방을 넉넉하게 채워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1인 방송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이렇게 오래 되었는데 여전히 새로울 것이 있다니 새삼스레 감동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시청자에게 질문을 건넸다. “오늘 제가 여기에 왜 나왔을까요?” 살짝 달뜬 목소리에서 쑥스러움도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예상을 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보여주거나, 혹은 요리 방송을 하려나 보다 하고 짐작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예상을 깔끔하게 무너뜨렸다. 그것도 가뿐하게, 와장창. 그녀는 이어 말했다. 

저는 오늘 축구 얘기를 할 거예요. 축구 해설을 해 보고 싶은 꿈이 있거든요.

짧은 두 마디에서 힘이 느껴졌다. 1인 방송이 그 동안 재야에 숨어있는 방송인을 발굴했던 만큼, 이제는 새로운 축구 해설자를 발굴하는 시간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맨날 TV에서 맨 할머니 역할만 하다가, 이런 거 하니까 어색하시죠?” 맞는 말이다. 이제 80에 가까운 할머니가 축구에 관해 전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미디어를 통해 본 적이 있었나. 내 역사에 그런 경험은 없었다. 여태 맨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는 그 말에서, 익숙하지만 매번 슬퍼지는 감정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를 잃고 놓쳐왔나, 싶어서.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때 두 명의 남성이 강부자를 중심으로 좌우 나란히 앉았다. 방송인 조우종과 스포츠해설가 한준희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방송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첫 번째 코너가 시작되었다. 바로 강부자의 역량 테스트. 오 마이 갓. 그러니까, 강부자가 축구 해설을 할 역량이 되는지 두 명의 남성이 친절하게 테스트를 해준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의문이 스쳤다. 강부자가 축구와 함께 한 세월이 어언 몇 십 년인데, 같이 맞추는 퀴즈도 아닌 역량 테스트가 굳이 필요한 건가? 마치 저 둘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그녀의 축구 지식이며 역량이 진실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저들은 강부자를 평가할 역량이 되는 걸까? 그녀는 보란 듯이 그 역량 테스트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풀어나갔다. 선수들의 등 번호만 보고도 이름을 불렀고, 해당 선수에 대한 애정 어린 말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문제에서는 원성 반 농담 반의 말을 남겼다. “뭐야 이거 (너무 쉽잖아).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조우종보다 업데이트 된 정보를 전했고 조우종은 축구를 본 지 꽤 되었다면서 머쓱해했다. 아무래도 그녀를 테스트 할 수 있는 건 강부자 자신 밖에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원론적인 질문으로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이기도 했다. 강부자가 축구 해설을 하는데 굳이 남성 해설자를 불러야 했을까. 축구 해설에 남자가 많은 게 그 이유라면, 왜 남자 밖에 없는가.

나는 어떻게 낭비가 될까?

TV는 출중하고 유능한 여성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자꾸만 되돌이켜 보게 된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아도 성공한 사람 중 남성이 대부분인 건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 거다. 남성 세계의 구미에 맞춰 여성들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을 테고, 그렇게 여성들은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을 거다. 애교가 있네 없네, 나만큼 잘 아네 모르네 하면서. 제시부터 강부자까지, 나부터 우리까지.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눈 여겨 보아야 한다. “나는 어떻게 낭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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