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되새기는 일
영화 <콜레트>는 인물의 정체성과 ‘이름’이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남편을 대신 해서 글을 쓰던 콜레트가 남편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적어버렸을 때 그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타인과 확실히 구별되는 자기정체성을 느끼면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이름을 확인하고, 부르고, 또 그에 대답하는 과정은 결국 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이 된다.
얼마 전 종영한 MBC <신입사관 구해령>은 노처녀인 채 사관이 되어버린, 조선시대 가부장사회에서 쓸모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구해령’의 이야기이다. 평소에 서책을 좋아하지만 연애 소설은 소름 끼쳐 하고, 천체와 과학에 호기심이 많아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존경하고, 거친 욕을 쉽게 내뱉으며, 뭇 남성들 보다 술을 많이 마셔도 끄떡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다. 구해령은 단순히 혼기가 찼다는 이유만으로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를 죽도록 원하지 않았고, 그렇게 여성 사관을 뽑는다는 곳으로 달려나간다.
사관들이 모여 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하는 예문관에는 과거를 통해 뽑힌 여사관 네 명이 있었다. 구해령을 비롯하여 송사희, 허아란, 오은임. 저마다의 서사가 균형 있게 나눠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여성 인물에게 뚜렷한 이름이 있어 꼭 기억하고 싶었다. ‘그 얼굴 예쁜 여자’나 ‘걔’로 통칭하는 시절은 이제 그만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살다 보니 이런 장면도 본다
<신입사관 구해령>의 방영 초기, 화제가 되었던 장면은 이림(차은우)과 구해령의 첫 만남도, 구해령이 혼례식을 박차고 달려나가던 때도 아니다. 바로 과거 시험장의 풍경이었다. 여성 사관을 뽑는다는 방이 붙었을 때 가문 망신이니 나가지 말라는 한탄이 한양 구석구석으로 흘러가던 것도 잠시, 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시험장으로 모여든 것이다. 그리고 여느 선비들이 그러하듯 편하게 자리를 잡고 긴 시간동안 문제에 골몰했다. 지금까지 여성이 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불문율이 존재했다. 궁녀가 되거나, 남장을 하거나, 타임 리프를 했거나. 그러니까 그 아무리 퓨전 사극을 찍어도 ‘여자가 과거를 보는 상상은’ 어디에도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살다 보니 이런 장면도 본다.
물론 예문관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과거에 붙었어도 성균관을 나오지 않은 애들은 껴주지 않는다며, ‘서리(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의 벼슬)’ 취급만 받는다. 여성 사관 사총사에게 주어진 일이라고는 그저 청소와 각종 허드렛일 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 사총사는 책을 읽을 줄도 쓸 줄도 아는 양반집 규수인 데다가, 심지어 송사희는 이조정랑의 맏딸이고 허아란은 집이 99칸인 한양 제일가는 부잣집 자식인데 남성 세계에 발 좀 들였더니 이런 취급을 받는 거다. 그리고 어디선가 친숙한 말이 이어진다.
성균관도 안 나오고 사관 되는 거, 이거 역차별 아니야?
결국 사달이 난다. 내명부 상궁들이 여성 사관들에게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위협하며 여성으로서 지조를 지킬 것을 협박한 것이다. 과거를 본다고 사내가 아니며, 관복을 입는다고 관원이 아니니 임금의 말만 따르고,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갓 입궁한 나인에게 흔히들 행하던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졸졸 쫓아가? 관원을 부를 때는 적법한 절차가 있고 원칙이 있는 거 몰라?" 양 봉교가 한심하다는 목소리로 이들을 나무란다. 그리고 허아란의 발악. "그걸 저희가 어찌 압니까? 뭘 알려주셨어야 알죠. 뭘 보고 배우려고 해도 아무것도 가르쳐 주질 않는데 대체 저희 더러 어떻게 알아서 하고 알아서 처신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무 것도 없는 척박한 궁 안에서 사총사가 감내해야 했던 것은, 여성 국회의원이 입성하기 전까지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주체성과 주인공 사이
주인공 자리를 도맡는다고 해서 주체적인 인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여성 주인공들이 ‘민폐 캐릭터’로 전락하는 과정을 지루하게도 많이 보았고, 한국 드라마의 한계성에 괴로워해야만 했다. 하지만 구해령만큼은 예외다. 이림의 혼인 소식으로 둘의 이별을 앞두었을 때, 구해령이 선택한 것은 구해령 자신이었다. 둘의 사랑을 어떻게든 연장시키기 위해 애쓰거나 억지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똑똑히 판단하고 그 기준에 자신을 먼저 세웠다. 자유의지를 향한 갈망, 그것이 구해령이 원하는 전부였다. 감정적으로 흐트러진 이림 앞에서 구해령은 또박또박 말한다. “저는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규문 안의 부부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요. 제가 그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고요.”
적당히 무심하고 의연하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것이 자신의 판단을 앞설 수는 없다. 걸쭉하게 욕도 잘 하고, 대범하게 배팅할 줄도 안다. 사랑과 연민을 느끼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몸소 알고 있다. 구해령을 보면서 나는 가장 거짓되고 가장 진실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가상이 아니고서야 절차를 밟고 관직에 오른 여성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거짓되고, 시대성에 부합하는 여성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장 진실되다.
영화 <알라딘>의 수록곡 ‘A Whole New World’와 <모아나>의 수록곡 ‘I am Moana’에는 공통된 가사가 있다. 바로 ‘I’ve come so far’와 ‘Moana, you’ve come so far.’ 이다. 두 주인공이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 ‘너무 많이 왔다’는 공통된 의미를 담은 노래이다. 영화만의 이야기일까. 우리도 <신입사관 구해령>과 함께 아주 많이 왔다. 구해령을 만난 뒤에 우리도 여성 주인공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그 전과 달라질 테고, 드라마에 요구할 것들도 더 세심해질 것이다.
극중 구해령의 글씨를 대신 써 준 여성 대필인이 SNS에 적은 글을 봤다. “여자를 대필하는 내가 가서 쓰는 내용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는 연서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이 붓을 드는 이유가 그것뿐인가, 하는 어딘지 모를 속상함. 해령이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궐 안에서 상소문을 쓴 날 얼마나 두근두근 떨렸는지.” 여성의 주된 자리가 만들어지면, 또 그 옆으로 새로운 여성들의 자리가 생긴다. 우린 더더욱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