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없던 이름
tvN의 수목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WWW(아래 검블유)>는 첫 방영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등장 인물의 8할을 여성들이 나눠 가지면서, 멋지고 야비하고 정의롭고 당찬 모습 또한 여성들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열망했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배타미다. 대한민국 인터넷 포털사이트 점유율 1위를 기록한 ‘유니콘’의 기획본부장인 배타미는 38살의 워커 홀릭으로, 유니콘의 대중적 장악을 이끌어낸 중심 인물이다.
단언컨대 배타미는 드라마의 혁명이고 혁신이다. TV 속에서 이런 여성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이 낯섦이 무척이나 반가워진다. 물론 당차고 씩씩하고 능력도 뛰어난 여성이 그간 드라마 속에서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JTBC <힘쎈여자 도봉순>에서는 ‘도봉순’이 남자들을 무력으로 거뜬하게 제압했고, KBS <마녀의 법정>에서 ‘마이듬’은 공공을 위한 정의가 아니라 자기만의 이득을 위해 나섰다. 다만, 우리가 배타미에게 유독 환호한다면, 그건 그만의 ‘수(手)’ 때문이다.
배타미는 아주 똑똑한 책략가다. 하나의 목표를 두고 다른 누구보다 몇 수를 앞서 볼 줄 알고, 그에 필요한 계획도 명확하게 세워낸다. 유니콘이 대통령 선거 토론회 이후 관련 검색어를 삭제했을 때, 배타미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반기를 들었다. 유니콘 초창기부터 함께 고군분투한 송가경 대표이사의 행적을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반면 남 정치인으로부터 검색어 조작을 의심 받기 시작했을 때, 배타미는 입장을 바꿔 유니콘을 두둔했다. 상황을 재빠르게 읽어내서 개인적인 의견과 공적인 대처에 거리를 둔 것이다. 배타미는 흐름을 읽어내는 눈과 탁월한 임기응변을 가졌다.
모두가 여자일 때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여성인 만큼, 이건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를 마주할 기회이기도 하다. 배타미의 직속 선배이자, 오랜 동료인 송가경 대표이사는 남편과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그런 그는 과로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유흥업소로 향한다. 무슨 일 있느냐는 룸살롱 매니저의 물음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무슨 일 없으면 여길 왜 와?” 하고 무심하게 대답할 뿐이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유흥업소 신입이 등장한다. 잔뜩 멋을 낸 남성은 그를 향해 “20대처럼 보여요” 라며 애교 넘치는 콧소리를 낸다. 그 말을 들은 송가경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는 법이 없다. 술을 따르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열 차례가 넘도록 다시 따르라고 명령하고, 모욕을 느낀 유흥업소 직원에게 말한다.
내가 너한테 평가 받으려고 여기 앉아 있는 줄 알아?
‘유니콘’의 경쟁업체이자 포털사이트 2위로 등극한 ‘바로’에도 공신이 있다. 소셜 본부장인 차현이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거침없이 나아가고 결코 망설이는 일이 없다. 배타미와 어떤 점에는 비슷하고, 또 어떤 점에는 다르다. 어떤 일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믿음의 근간이 자신의 능력이라는 데에 비슷하고, 계략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무대뽀 구석이 조금 다르다. 엘레베이터에서 한 남성에게 성추행을 당했을 때, 그는 가멸차게 귀싸대기를 날렸다. 가해자가 반동에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강력한 한방이었다. 차현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발로 밟고, 짓이기면서 복수를 이어갔고 그 덕에 폭행죄로 전과를 달게 됐다. 혹자는 차현을 두고 충동적인 여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추행을 한 그 남자가 충동적일까, 합리적으로 분노한 차현이 충동적일까? 그가 두려움 없이 자신의 감정만을 최우선으로 둘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차현은 배타미를 적극적으로 경계하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가만히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반대를 외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불편했느냐고? 전혀. 여적여는 무슨. 오히려 차현과 배타미 사이에 보완책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이 될 수 있고, 그걸 우리가 해낼 수 있다는 결심 같은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늘 동의하고 응원을 하는 것만이 동료는 아닌 만큼, 창과 방패의 싸움 안에서도 그들만의 동지애가 느껴진다.
사랑이요? 여기서요?
배타미와 송가경 그리고 차현. 세 여자를 둘러싼 환경은 완벽해 보였다. 이로써 디폴트가 여성인 사회가 얼마나 멋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짧게 등장한 징계위원회조차 여성이 대부분이었을 때. 송가경에게 정치적 관계를 종용하는 것이 시아버지가 아니라 시어머니였을 때. 그 시어머니가 정치인들과 로비 활동을 할 때. 시어머니가 취미로 그리는 누드화의 모델이 남성이었을 때. 모든 주체가 여성이고 객체가 남성인, 탁월한 디폴트 변경으로 이야기는 무척 낯설어진다. 그리고 왜 이런 모습이 낯설게 다가오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다만 딱 한 가지. 공식 홈페이지에서 드라마를 소개하는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트렌드를 이끄는 포털사이트, 그 안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여자들과 그녀들의 마음을 흔드는 남자들의 리얼 로맨스'. 아뿔싸. 이제야 여성이 기본 설정인 세계가 만들어졌는데, 또 여기에 러브 라인이 들어간다는 거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 역전과 성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굳이 여기에 로맨스를? 차현과 배타미의 인생에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란 말일까? 당차게 일하는 어떤 인물이 있는데, 다만 그 삶에 한 부분으로 사랑이 있다더라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을까? 나는 궁금하다. 여성 서사에 러브 라인을 넣음으로써 과연 이득을 보는 게 임수정이고, 이다흰이고, 전혜진일까? 그 멋진 로맨스를 위해서 ‘남자 주인공’ 자리가 생겨버렸는데도?
게다가 어느 것 하나 모자랄 게 없어 보이는 배타미가 박모건과 하룻밤을 보내게 됐을 때, 다음날 후회하면서 읊조리던 말이 무엇이던가.
스물 여덟도 아니고 서른 여덟에 이게 무슨 일이야.
지워진 여성의 이야기를 되찾고, 집안에 숨은 3040 여성롤모델을 발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힘을 썼나. 그런데 갑자기 나잇값을 운운하다니. 게다가 배타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이차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박모건이 말한다.
스물 여덟은 이래요. 열정은 무한하고 열정의 주인은 나예요!
현실로 넘어올 차례
처음 <검블유>를 추천했던 친구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거 보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면, 죽어도 성공하고 싶어.” 배타미가 유니콘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은 다음 날, 회사에 직접 찾아가 경쟁사 이직과 복수를 선언했을 때, 음절 마다 실린 그의 힘을 기억한다. 엘레베이터를 타기 위해 홀로 터덜터덜 복도를 거닐어 나올 때, 묵직하고 결연한 표정도 잊히지 않는다. 회사에 따라 나의 성공 여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거처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바뀐다는 그 자세와 자신감. 정말이지, 배타미처럼 성공하고 싶어진다.
잘 갖춰진 세계를 접하고 나면, 그 너머의 우리네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현실 속 IT업계 남녀비율은 결코 <검블유> 같지 않단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네이버의 경우 여성 임직원 비율은 21%, 전체 직원 대비 여성 직원의 비율이 36%다. 기사에는 두 지표 모두 업종 평균인 각각 5%와 33%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설명도 굳이 붙어 있었다. 씁쓸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질문이 하나 둘 번뜩인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에게 성공 욕구를 전해준 세 여자가 정말 실존할 수 있을까? 배타미, 송가경, 차현을 현실에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