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콩 났다
tvN <삼시세끼 산촌편>이 방영 전 홍보로 한창일 때,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삼시세끼 여자판’ 이라는 문구였다. 염정아를 필두로 두 명의 여배우가 더 나온다는 보도자료도 함께 접했다. 나영석 PD의 ‘어쩔 수 없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라, 놀랍지 않다가도 새삼 실망스럽기도 했다. ‘여자판’과 ‘여배우’는 그 원형이 남성에게 있다는 것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2014년 <삼시세끼 정선편>을 비롯해서 총 7개의 시리즈가 이어졌지만 여성 출연자가 메인으로 등장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5년은 지나서야 말 그대로 ‘삼시세끼 여자판’이 나온 거다. 이서진, 옥택연, 유해진, 차승원, 손호준, 김광규, 남주혁, 에릭, 윤균상 등이 출연해 주목을 받는 동안 여성들은 게스트가 될 뿐이었다.
나영석 PD는 방송계 알탕 문화를 선도하기로 유명하다. KBS <1박2일>을 시작으로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청춘>, <알쓸신잡>에서 대부분 남성 출연자를 기용했고, 화룡점정으로 <신서유기> 시리즈에서는 각종 범죄에 연루된 연예인들을 자체 용서하고 복귀시키는 데 힘썼다. <꽃보다 누나>가 있지 않느냐고? 제작 공동인터뷰에서 여배우가 다른 남성 출연진들보다 5000배 예민하다고 유난이었던 게 누구더라.
무엇보다 보통 사람보다 5000배는 예민한 여배우들의 눈치를 살피는 게 가장 힘들었다는 뒤늦은 하소연이 이어졌다. '꽃보다 할배' 때의 여행과 어떤 차이가 있었냐는 질문 뒤에 나온 답변이었다.
"티저 영상만 보더라도 굉장히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여자들은 잠자리, 화장실만 바뀌어도 힘들어하더라고요. 저도 여자를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고, (이)승기도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죠. (중략)"
여배우들을 통제하는 부분에 대해 묻자 그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정우성과 오나라 사이
가뭄에 콩 나듯 제작된, 여성 출연진 중심의 <삼시세끼 산촌편>을 향한 반응은 무척 뜨겁다. 1회 시청률 7.2%를 기록하며 순항을 시작했고, 지난 8월 30일에는 7.1%로 동시대 프로그램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시청자 평가를 보면 염정아와 윤세아, 박소담의 다정한 관계에서 오는 ‘편안함’이 유독 많이 언급됐다. 매 끼니 메뉴가 정해지면 세 멤버는 각자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 열심히 집중했다. 일의 균형이 잘 유지되었고,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일만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힘이 부칠 때면 융통성 있게 메뉴를 바꾸었고 누군가 일이 넘치면 스스럼없이 서로의 손을 보탰다.
한국의 가사노동 역사 중 가장 오래된 '품앗이' 문화가 여성들에게 어떻게 전이돼 왔는지 한번쯤 돌아보게 되는 장면이기도 했다. 서열과 체계를 떠나 당장의 공동 목표를 두고 단계별 분배를 딱딱 나누는 것이 김장철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보다 어린 여성에게 ‘애기’라고 부르며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도 친근한 풍경 중 하나다. 박소담이 연기에 눈이 매워 눈물을 훔칠 적마다 윤세아와 염정아는 ‘으유, 우리 애기….’라며 안타까운 목소리를 더했다. 나중에 박소담이 29살인 것을 알고 난 뒤에 나는 박수를 치며 파안대소를 했다. 그리고 집단마다 막내로 있던 내 주변의 여자들을 떠올렸다. 한번쯤 우리가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기고, 안아주고, 머리를 새로이 쫑 매주던 우리들의 막내를. 여자들은 그랬다.
그리고 첫 게스트가 등장했다. 동공지진을 부르는 노래 실력과 함께 나타난 건 바로 배우 정우성이었다. 염정아와 첫 인사를 나누는 순간은 너무 아름다워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평온한 감상도 잠시, 이상한 점이 점차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정우성이 불 떼는 것을 맡은 뒤로 그의 태도가 어쩐지 겸연쩍었던 것이다. 정우성은 계속해서 자신이 얼마나 이 일을 잘 했는지 무던히 피력했고, 세 명의 출연자와 심지어 제작진이 그에 맞춰 칭찬을 해주었다. 소시지가 불 때문에 잘 익었네, 커피가 잘 볶아졌네, 하면서 말이다. <삼시세끼> 시리즈가 애초에 자급자족을 주요 소재로 둔 순간부터 출연자의 노동은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구성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땀 흘려 물고기를 잡고, 땅을 파고, 요리를 했던 것인데 이런 생색은 정말이지 낯설기 그지 없다. 무엇보다 익숙하다 못해 질려버린 어떤 말이 자꾸 머릿속에 스친다. “남자는 원래 칭찬이 필요한 동물이야. 칭찬 해주면 더 잘해.”
물론 칭찬이야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사람은 칭찬으로 자란다. 칭찬보다 질타와 지적을 반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이 유난스러움이 프로그램에 그렇게 필요한 것인지, 그러니까 정말로 ‘이게 웃긴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꽃보다 누나>의 공식 인터뷰에서 여성 배우들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고 말한 나영석이 이렇게 정우성의 응석 아닌 응석을 잘 받아줄 줄이야. 정우성을 향한 나영석의 태도가 얼마나 곱고 조신한지, 자막에도 이렇게 표기된다. “깍-듯”.
생경한 풍경이었다. 도대체 정우성의 태도가 재미있다면 왜 그 전까지 염정아, 박소담, 윤세아가 질세라 자가칭찬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하다. 최소한 이 프로그램 안에서는 당연한 일이니까.
없어도 된다
지난 8월 30일에는 두 번째 게스트로 배우 오나라가 등장했다. 오랜만에 만난 배우들은 서로 안기고 볼을 부비면서 다정을 표했다. JTBC <스카이 캐슬>에서 합을 맞추며 친해진 동료가 방문한 만큼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갓 찾아온 오나라도 모든 노동을 반갑게 도왔다. 수도꼭지에 연결된 고무 호스를 더 편리하게 바꿔주고, 샐러드 소스도 맛있게 살려냈다. 텃밭에 배추 모종을 심을 때에는 "나라가 같이 하니까 진짜 시간이 절약된다."라는 염정아의 말에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라고 답하기도 했다. 처음 만나는 박소담의 피로를 걱정하면서, 또 여자들만의 ‘애기 타임’이 만들어졌다. 다시 편안해졌다.
“우리가 제일 편한 사람이 오는 게 좋은 것 같다.” 염정아가 말했다. 시청자도 그렇다. 염정아, 윤세아, 박소담에게 삼시세끼를 걱정하는 것 외에 다른 고민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 오는 게 가장 좋다. 많은 이들이 ‘역시 나영석’이라며 <삼시세끼 산촌편>을 칭찬할 때, 나는 그 사이에 놓쳐버린 몇 문장을 더하고 싶다. ‘시기적절하게 여성 출연진을 배치한 나영석의 눈치와 영리함이 놀랍지만, 나영석의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염정아, 윤세아, 박소담이라면 무조건 대성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