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언박싱 12. 언니들이 돌아왔다, <캠핑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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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언박싱 12. 언니들이 돌아왔다, <캠핑 클럽>

이자연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우리 언니

언니들이 돌아왔다. 14년만이었다. 걸그룹 1세대 ‘핑클’의 전 멤버가 모여 캠핑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캠핑 클럽>은 JTBC가 <효리네 민박집>에 이어 이효리와 함께 하는 두 번째 예능이었고,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멤버 조합을 구성하면서 방영 전부터 사람들의 기대가 뜨거웠다. 사실 시청자가 옛 추억을 회상하고 그리움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미 MBC <무한도전>에서 경험한 바 있다.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프로젝트를 통해 90년대에 내로라하는 유명 가수들이 모여 그때로 돌아간 느낌을 성공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핑클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함께 모이지 못했고 당시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달래지 못한 채 미완의 상태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첫 장면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들썩였다. 네 멤버가 한 자리에 모이자마자 많은 이들이 울컥함을 느꼈다. 사실 핑클 얘기에 있어서 무성하게 떠돌아다녔던 관계성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누구랑 누가 격렬하게 싸웠다고 하네, 누가 따돌림을 받네, 연락 한 번 한 적이 없네 하는 소문들이 그들을 질리도록 오랫동안 쫓아다녔다. 그 중에서도 그런 질문은 주로 이효리의 몫이었다. 토크 쇼에서 핑클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멤버간 관계에 대해서 늘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친하지 않음’이 유난히 부풀려지고, 나아가 당사자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잣대로 이용되는 게 새로운 풍경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치졸한 일이다. 형체 없는 소문을 짊어지고 지냈을 멤버들이 한 데 모였을 때 마음이 일렁인 건 아마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잘못한 거 하나 없이 소문들에 가리워 다시는 함께 모일 수 없을 줄 알았던 언니들을 이렇게 우리가 만나다니. 그런 소문 즈음이야 별 거 아니고, 이제는 마주 앉아 밥도 먹고, 술도 나눠 마시고, 흘러가버린 언제가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되다니.

일러스트 이민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문득 노래 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1집 <루비>에 관한 이야기였다. “<루비>도 바람 피운 거잖아, 남자친구가.” 성유리의 말에 이진이 답한다. “지금 같았으면 이러는데. ‘야! 너 가져.’” 호방한 말들이 오가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상황에 적극적으로 덤비지 못하고 혼자 ‘아이 캔 크라이’한다는 후렴구에서는 “애들이 참 수동적이지? 보내주긴 뭘 보내줘. 얻다 곱게 보내줘.” 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화룡점정. 이 노래가 어떻게 끝나더라?, 누군가의 질문에 다같이 마지막 소절을 부르다 파안대소를 한다. 

난 여전히 너의 여자야.

비웃음 섞인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어리기만 하던 여자 애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린 여성에게 섹스 어필을 더하기 위해 ‘어엿한 여자가 된 소녀’라고 덧붙이던 이름표는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고, 그때가 틀렸다고 시원하게 말할 줄도 알고 조롱할 줄도 아는 멋진 어른이 되었다는 거다. 여자가 아니라 어른이 된다는 당연한 말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귀한지 새삼스럽다.

이 장면을 보면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몇몇 노래들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종종 나누는 주제이기도 한데,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즐겨 듣던 노래가 이제는 차마 들어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성별 편견을 일반화한 쿨의 <남녀해석>, 관음에 가까운 god의 <관찰>, 여성 외모 평가의 끝판왕 2pm의 <10점 만점에 10점> 등 노래 속에 내재된 일상적인 여성혐오가 청취를 곤욕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멤버들이 땅바닥에 앉아 김밥에 라떼를 곁들여 먹으며 나누던 이야기가 이런 내용이라니, 퍽 반갑다. 이제는 이게 잘못된 줄 아는 것, 그 사실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꿨는지 모른다. 그리고 핑클도 옛날의 핑클이 아니다. 여기서 잠깐.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하는 오빠들이 돌아와서, 과거의 노래가 지금 들으니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 단연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틀렸다는 걸 그들은 알 필요도, 관심도 없으니까.

평화롭고 평온하게

해가 지니 강가 근처로 냉기가 급히 올라왔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크게 피고 핑클 멤버들은 모두 그대로 둘러 앉았다. 그러다 한때 다리를 꽁꽁 감추고 다니던 이진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다른 멤버들과 달리 다리가 두꺼운 것 같아서 매일 긴 바지만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나이에, 대중 앞에서 A부터 Z까지 세밀하게 평가를 받는 게 일이니 그 움츠러듦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때 성유리가 말했다. 

도대체 왜 다리를 가리고 다녔을까? 별로 두껍지도 않은데.

실제로 이진이 하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었다던 요가 동작이 ‘이진 하체 요가’라는 이름으로 일파만파 퍼져나갔었고, 다리털이 수북해서라는 못된 루머가 있던 걸 보면 그의 다리가 ‘두껍다’는 평가로부터 얼마나 제약 받았었는지 가늠이 된다.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모양까지 어느 것 하나 내버려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유리의 말이 자꾸 마음을 찌른다. ‘도대체 왜 가리고 다녔을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습게도 <캠핑클럽>이 끝난 뒤에도 이들을 향한 평가가 계속 이어졌다. 40대를 믿을 수 없는 외모, 성유리 세안 법, 20대랑 똑 같은 빛나는 동안. 세상도 핑클도 이렇게 변했는데, 변화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갑작스러운 분노가 올라오곤 한다. 그들만큼은 이 세계로 오지 않아주었으면 좋겠다. 네 명의 멤버들이든 그들을 바라보는 시청자든, 이곳에서만큼은 평온하게 있어야 한다.

일러스트 이민

나의 언니, 우리의 언니

모닥불 사이로 의미 없는 말들이 금세 휘발됐다. 나는 여성 특유의, 다정함을 베이스로 한 무의미한 농담이 좋다. 남성 출연자들이 떼로 나와서 매번 보여주는 서열도, 지저분한 유머도, 얼굴이나 배를 때리는 불쾌한 장난도 없으니 어찌나 무해하고 평온한지 모른다. 사실 <캠핑 클럽>에서 그들이 한 거라곤 먹고, 집 짓고, 먹고, 쉬다가, 야한 이야기를 하다가, 장난치고, 먹는 것뿐이다. 여느 여자들이 노는 평범한 모습이 전부 담겨 있었다.

소녀시대 멤버들이 모여서 <캠핑 클럽>을 봤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또 얼마나 마음이 찡해졌는지 모른다. 핑클 멤버들끼리 우리가 그때 그래서 힘들었는데, 하면서 나누던 그 연대와 공감은 그걸 보고 자란 소녀시대로 내려올 거고, 또 다른 걸그룹 아이돌에게 전해질 거다. 남성 연예인들이 몰카, 약물 강간, 성추행 등 각종 성범죄로 논란이 되는 와중에 여성들은 서로를 지켜주고 위로하고 사랑한다. ‘언니’라는 이름만으로도 수 많은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이유다. 우리의 언니들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그 어떤 어줍잖은 평가와 악플, 신경전으로 노출되지 않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지켜주고 위로하고 사랑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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