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가의 아이들
최근 지인의 부탁으로 두 달 동안 학원에서 일을 했다. 중학생들에게 영어 회화와 문법을 가르치는 게 주된 업무였다. 스무 살부터 첫 직장을 가질 때까지 7여 년을 강사로 일한 덕에 아이들과 경계를 허물고 가까워지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여느 ‘요즘 아이들’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들이 무색하게 학생들은 어른을 잘 따랐고, 말과 행동을 스스로 점검할 줄 알았으며, 선생님의 관심을 원했다. 그날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늘어놓다가, ‘청소당번’이나 ‘시험 기간’ 같이 내게 너무 멀어져 버린 단어를 쓸 때엔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영악한 아이들을 보면서 그 나이답게 잘 커 가고 있다고 믿었다. 딱 하나 빼고.
아이들은 종종 내게 재미있는 유튜버를 찾았다면서 영상을 공유해주곤 했다. 그런 것들은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별 뜻 없는 유행어를 계속해서 반복하기, 과장되게 우스꽝스러운 얼굴 표정을 짓고 행동하기, 친구가 깜짝 놀랄 몰래 카메라 하기, 욕설과 은어가 난무한 더빙 작업이나 패러디 그리고 인싸가 되기 위한 열렬한 규칙 몇 가지 소개하기. 언뜻 봐도 정제되지 않은 콘텐츠에 저토록 해맑은 목소리로 깔깔거리다니. 단언컨대 그건 거짓된 웃음이 아니었다. 정말 그것들이 웃겨서 웃는 거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아이들과 유튜브가 훨씬 가깝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즈음, TV채널을 돌리다 적잖게 당황했다. 학생들이 내게 공유했던 그 콘텐츠가 투니버스에서 방영되고 있던 것이다. 욕설이나 은어,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내용 등은 제외되거나 다듬어져 있었지만 어쩐지 투니버스의 선택은 놀랠 노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투니버스가 선택한, 일명 ‘투니버스 픽’을 둘러보기로 했다.
투니버스와 유튜브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TV 안으로 들어온 게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MBC <라디오 스타>에는 이사배와 감스트가 출연했고, tvN <놀라운 토요일>에는 입 짧은 해님이 나왔다. 화제성이나 수익성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큰 저력을 보이면서 매체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투니버스 주된 시청자 타겟이 어린이라고 가정할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튜버를 출연시키는 것이 무리는 아닐 테다.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것’에 매몰되어 놓치고 만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투니버스에 방영된 <급식왕>은 여성 출연자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무의미하게 폭력적인 장면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로부터 권고 조치를 받았다.
심지어 <흔한 남매>의 경우, 방심위로부터 의견진술 이후 심의하기로 결정됐는데, 경각심이 더욱 무뎌 보였다. 한 출연자가 다른 출연자를 몰래 촬영하고 난 뒤,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미션 수행을 강행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고, 얼굴을 투명 테이프로 칭칭 감아 지나치게 희화화하는 영상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표정을 이상하게 찌푸리고 혀를 길게 내밀면서 팔과 손가락을 꼬는 장면은 지체장애인을 연상시켜 오늘날 지양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투니버스가 아이들을 위해 ‘선택한’ 콘텐츠라고 하기에 문제점이 명확해도 너무 명확해 보였다.
웃기지 않느냐는 말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미투 운동을 희화하고, 누군가의 외모를 조롱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성희롱하고, 가난을 비꼬면서. 웃는 거야 누군들 싫을까. 다만 그 웃음으로 거래되는 무언가가 누군가의 처지이고 상처일 때, 민감하게 다뤄져야 할 사안일 때, 사회적 약자의 모습일 때, 인간의 존엄을 가로막을 때, 그때부터 그건 더 이상 웃기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투니버스가 이 콘텐츠를 선택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원래 개그가 그렇지 뭐’, ‘요즘 애들이 이런 걸 좋아하는 걸 어떡해’ 라는 이유로 그 선택을 설명한다면, 결국 여성혐오와 약자 차별로 가득한 세계와 연대하겠다는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농담과 유머는 어른의 세계에서 어린이들의 세계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술자리에서, 단톡방에서 많은 남성들이 ‘개웃기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대신하는 풍경은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외면한 웃음 속에는 수 많은 문제가 농담인 척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게 모두 투니버스 셀렉션
여자아이들의 경우, 직접적으로 태도에 영향을 주는 콘텐츠가 많은 편이기도 하다. 투니버스가 제작하는 키즈 예능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말들은 이렇다.
“제 생얼 어떠신가요? 되게 자신감이 없네요.”“이 블러셔는 반짝반짝하고 여리여리해서 좋아요.”
키즈 예능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뷰티 정보를 계속해서 생산한다. 10대 또래가 직접 말하는 데일리 메이크업인 만큼 아이들의 강한 신뢰도 따른다. 그 뿐이 아니다. TV와 유튜브에서 동시 방영한 웹 드라마 <빛나는 나라>는 여자 아이가 우연히 매직 메이크업 키트를 발견하면서 로맨스를 이어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일러 문>이 ‘변신’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이전 여성들에게 제약을 주었다면, 이제는 <빛나는 나라>가 그 역할을 이어받는 듯했다. 풀 메이크업을 한 아이로 변신한 주인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이후에 어떤 꿈을 꾸게 될까. 더구나 주인공이 그 덕으로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면? 문득 수련회를 떠난다며 설레하던 P양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게 건넨 말도 기억난다.
수련회 가면 쌩얼로 있어야 되는데 너무 부담돼요.
그리고 이어지는 M군의 답변.
괜찮아. 넌 화장 전후 별로 안 다르니까.
어느 날에는 학원 교무실에서 남강사가 학생을 혼내며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됐다. “남자애면 때리기라도 하지. 여자애라 때리지도 못하고.” 그는 사뭇 기사도 정신을 가미했다는 듯 우쭐해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참으로 고약하다고 생각한다. 남자애면 때리기라도 한다는 건 결국 ‘남자들끼리는 그냥 때리는 게 편한데’ 라는 함의가 있고, 그 ‘편안함’은 여자이기 때문에 거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를 너그럽게 생각한 척, 우대한 척, 봐준 척.
투니버스도 다르지 않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웃긴 이야기인 척, 여아를 위한 콘텐츠가 월등히 다양하고 많은 척. 물론 투니버스에서 모든 문제가 비롯되었다는 말은 다소 억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뚜렷한 제지가 없으니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비슷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방영해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꾸준함에 대한 질문이 딱 하나 있다. 그런 콘텐츠를 ‘선별’하고 ‘제작’하는 과정에 어느 누구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면, 투니버스는 과연 무엇을 위한 채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