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하기 좋은 날 12. 나의 다짐, 나의 원칙

생각하다독립결혼과 비혼

비혼하기 좋은 날 12. 나의 다짐, 나의 원칙

윤이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비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것은 올해 초의 일이다. 결혼은 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게 지금 당장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깊이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올해의 첫 원고 청탁으로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칼럼 써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 글에 비혼주의자로서 지금 내가 사랑하는 나와 살고있다는 이야기를 쓰기로 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았고 결혼을 하지 않을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아이고, 결혼은 포기했니?

그 글은 연말의 가족의 오랜 지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아이고, 이나야. 결혼은 포기했니?”라는 믿기지 않는 질문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비혼이라는 상태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지 못해서 포기해버린 상태로 보인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고, 나의 부모와 또 가까운 이들 역시 이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실은 나조차도 그랬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결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성애자로서 이성애 연애 관계를 맺는 일에 그다지 재능이 없고, 그 관계를 결혼이라는 최종 목표로까지 끌고 갈 의지와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기를 택한 것은 아닐까?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비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인생에서 결혼을 빼기로 했다면, 그건 어떤 의미인가? 그렇지만 여기에서 바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결혼을 빼지? 원래 없었던 것을 어떻게 뺀단 말인가? 결혼이라는 관문이 그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인 것처럼 모두들 말하고 있지만, 결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부자연스러운 제도인 것이다. 원래 없던 것을 삶에 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존재하는 삶과 어떤 제도로 편입된 삶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서야, 나는 내 삶에 대해서 이렇게 쓸 수 있게 됐다. “지금 내가 오직 나 자신만을 책임지고 있는 삶은 비혼주의자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이지만, 내가 비혼을 택하지 않았다면 얻기 어려웠을 삶의 방식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나는 여기 이런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이 상태 안에서, 나는 자연스럽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나는 결혼을 택하지 않았을 뿐, 무엇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겨우 몇 사람만 내 삶의 상태를 포기로 간주하고 도태시키려한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데, 무려 국가가 나를 뒷전으로 두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법과 제도가 문제였다. 비혼 30대 여성 프리랜서인 나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맨 뒷자리에 있다. 

주택 청약에서, 부동산 정책에서 고려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설득해야 할 유권자 순위에서도 꼴찌처럼 보인다. 비혼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미혼으로 바꿔 읽혀 나는 순식간에 머지 않은 미래에 결혼을 염두에 둔 사람으로 간주되고, 미완의 상태로 여겨지며, 언젠가 끊어야 할 골인 선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 된다. 그 다음은 출산, 육아 등등의 선이 표시되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안 가겠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나는 이토록 쉽게 보편의 범주에서 밀릴 줄 몰랐다. 하지만 이전에는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비혼을 택하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있는 줄도 역시 몰랐다. 비혼이라는 삶의 양식에 대해, 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혼은 오래되고 중요한 의제다. 제도로 보장받지 못하는 관계의 인정을 위해, 정상가족의 신화를 벗어나 살아가며 이 나라의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기 위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생활동반자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에 더해 주거면에서 완전한 1인 가구를 탰했다 하더라도 집으로 요구르트를 배달받는 것 너머의 복지와 안전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아마도 비혼으로 살게되겠지’의 막연함을 넘어 ‘비혼으로 생존하기’ 단계의 고민을 하게 되자 시민으로서의 고민을 함께 하게 됐고, 더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일상의 많은 부분을 홀로 꾸려나갈 방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확신과 선언은 힘이 세다. 그러니 누군가 지금도 ‘아마도’에 머물러있다면, 그 막연함에 맞서 분명한 언어로 자신의 오늘과 미래에 대해 써보기를.

막연함에 맞서는 언어로

“언젠가 나 자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타인이 생기고 또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은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도 결혼이라는 계약으로 세트로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고, 떠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만나고, 멀어지는 그 모든 관계를 나라는 개인과 너라는 개인이 만나 어떤 강제력도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고 또 견디고 싶다. 외롭다는 이유로 사람을, 반려 동물을, 연애를,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택하지 않을 것. 그들과 함께 살고 싶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들과 물리적인 공간을 나눌 것. 이것이 나의 원칙이다.”

이건 비혼하기 좋은 날이었던 올해 초 어느 날 나의 다짐이다. 결혼 없이 오늘을 살며, 미래로 걸어갈 당신에게는 바로 오늘이 비혼하기 좋은 날일테다. 앞으로 걸어갈 길에는 지루한 결혼행진곡 대신 꼭,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두기를.

<비혼하기 좋은 날>이 12화를 끝으로 완결되었습니다. 완결을 기념해 윤이나 작가와 함께 비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신청은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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