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의 가족들은 조금 놀랐지만 어쩔 수 없다며 생각보다 쉽게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가족들 역시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 모든 일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나는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던 상견례 자리에 안착했다. 미리 각자의 가족들을 만나 인사를 한 뒤였지만 어쨌거나 불편한 자리였다. 몇 가지 형식적인 인사말이 오간 뒤 마침내 앞으로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양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요즘 세상에 남자가, 여자가 이런 말이 어디 있냐며 부담 갖지 말고 서로 편하게 맞춰가자고 했다.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날 무렵 갑자기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우리 아들이 이렇게 떠난다고 하니까 좋은 일인데 참 갑자기 마음이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잘 우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의 어머니가 마음이 여리다고만 생각했다. 그 일을 빼고는 별 탈 없이 상견례도 마쳤다. 나는 결혼식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기대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싼 드레스를 골랐다.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가지 않았다. 그저 빨리 이 모든 일을 해치우고 싶었다.
하나만 달라진 줄 알았는데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지 약 50일이 지난 뒤, 모든 일은 끝났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달라진 점은 이제 부모님과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 뿐 이었다. 이제 나와 함께 사는 사람은 한때는 후배였고 한때는 만나는 사람이던 그였다.
확실히 처음에는 그것 하나만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그것 하나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성차별이 존재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직접 느끼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여자라서 못한 것이 없었다. 내가 여자라서 안 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을 넘어설 자신이 있었다. 확실히 나는 내 능력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저 나는 여자로 태어났을 뿐 나는 인간이고 나라는 사람이며 내가 마주치는 현실의 차별은 나의 성별과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 아니, 적어도 그러한 차별은 내가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단 한순간도 여자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기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그와의 관계도 그러했다. 그는 나의 후배였고 내 말을 따르는 편이었다.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나의 비중이 더 높았고 누가 봐도 관계의 주도권은 내게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나와 결혼한 뒤 평소보다 더 주변에서 어른 대접을 받는 일들이 생겨났다.
“책임감 있는 선택을 했어.”
“이렇게 책임지고 결혼해서 애 아빠가 된다는 게 쉽지는 않은데, 다시 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나에게는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는 이런 말들이 돌아왔다.
“회사는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애 엄마가 된다니 신기하다.”
나와 결혼하는 그에게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나였다. 특히 결혼 전, 결혼 생각이 전혀 없던 나에게 그의 장점으로 보였던 모든 상황은 고스란히 단점이 되었다. 특별히 정해진 돈벌이가 없었던 그는 결혼 후에도 그 생활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의 부모가 결혼 초반에 생활비 조금을 보태주겠다며 그에게 얼마간의 돈을 보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그의 용돈이 되어 사라졌다.
대체로 그런 날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곧 아이가 태어나면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를 전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루하루 무거워져가는 몸을 끌고 돌아온 집은 예전 같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함께 준비하는 따듯한 밥을 기다렸다는 건 아니다. 그냥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예전처럼 쉴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집안일이 서툴렀던 나보다도 집안일에 서툴렀다.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와 엉망이 된 집을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분명 아이가 태어나면 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 뻔했다. 나는 막막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상황이 나빠졌는데도 부모님과 살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생활비가 나갔다. 집안일로 다투는 일이 싫어 청소를 도와주시는 분을 불렀다. 외식이 잦아지니 식비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아이가 태어난다면 분명 더 많은 돈이 들 것이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불안은 다툼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나의 간섭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는 나의 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내 말에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존중하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대체로 그런 날이었다.
대체로 그렇지 않은 날
그렇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시작은 비슷했다. 별 것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작은 불씨가 생겼다. 그 불씨는 삽시간에 번져 싸움이 되고 말았다. 나는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그를 탓했고, 그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나를 탓했다. 평소와 비슷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혼자 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와는 분명히 달랐다.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머리를 벽에 큰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금 뭐하는 거야?”
느닷없는 행동에 놀라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 표정은 내가 예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그럼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데? 다 내 잘못이니까 내가 그냥 죽어야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 있던 것들을 꺼내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는 현관으로 향했다. 타인의 분노가 가득한 모습은 살면서 처음으로 보는 장면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가 정말 죽어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 지금 제 정신이야?”
나는 간신히 그를 붙잡고 물었다. 그는 나를 뿌리친 채 울부짖듯 크게 외쳤다.
“나도 힘들어! 힘들다고!”
“네가 그러면 나는 괜찮아? 일을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제발 나가지 마.”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붙잡았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해결? 지금 나만 여기서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 되는 거 아냐?”
그 때 당시 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 5층이었다. 문을 열면 눈 앞에는 당장 마음만 먹으면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의 창문도 없는 벽이 있었다. 무서웠다. 그 표정과 행동은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애원했다.
“제발 그러지 마, 안 돼.”
“내 말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어준 적 있어?”
“듣고 있어, 지금 들을 게. 정신 차려 제발. 그 건 안 돼.”
그는 분에 못 이긴 듯 크게 고함을 쳤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그렇게 나가버리자 나는 잠시 머릿속이 비어버린 것 같았다. 일단 그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그를 쫓아 달려갔다. 그는 아직 뛰어내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옷을 붙잡았다.
“제발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놔.”
“놓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일단 들어가.”
“아, 안 죽으니까 그냥 놓으라고!”
그는 다시 나를 뿌리쳤다. 그의 옷에서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대로 밀쳐져 아파트 복도에 주저앉았다. 곧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그는 죽지 않았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그 순간 누가 이 소리를 듣는다면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를 꽉 물었다. 나는 간신히 일어났다. 누가 엉망인 나를 볼까 두려워 재빨리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서서 우리의 집을 둘러보았다. 쌓여있는 설거지, 빨래, 그가 방금 집어던진 물건들 그리고 맨발로 현관에 서 있는 나. 어리석게도 나는 그때서야 이 악몽 같은 모든 것이 내게 주어진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