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정을 포함해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그보다 더 많이 책임지고 있었다. 나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가족들 오직 B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통을 들먹이며 그들을 받들어 뫼시기를 요구했다. 그 순간 이후 나는 그의 가족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 온 뒤, 여전히 냉랭한 내 태도에 눈치를 보던 B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조금 우리 가족들에게 실망했어.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할게. 약속해. 미안 A.”
그는 나를 달랬다. 나는 그의 말에 꽤 진정성을 느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또 한 번 그저 그 말을 믿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말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신경 쓰지 마. 내가 다 해결할게, 알았지?”
나의 대꾸에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다 해결할게?
그리고 그 믿음에 답이라도 하듯 바로 그 다음 날, 그의 엄마와 동생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그 날 해야 할일이 있다며 집을 나간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어쩐 일이세요?”
“내가 내려가기 전에 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 C도 새언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고, 그렇지?”
C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어제 B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이 기분에 사과 받고 싶지 않은데.’
나는 두 사람이 나에게 사과를 하러 온 것이리라 추측했다. 나는 잔뜩 굳은 얼굴을 풀기 위해 애썼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사과를 하러 온 사람들을 내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굳었던 얼굴을 풀기 위해 애썼다. 속이 잔뜩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우리 B를 결혼 시키고 기대했던 게 많았던 것 같아. 나는 우리 B가 결혼을 하면 A라는 새 가족이 들어오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B의 엄마의 말은 내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는 곧바로 그들이 내게 사과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A가 우리 집에 시집 온 게 아니라 내가, 우리 아들을 빼앗긴 기분이 들어.”
그렇게 말하고는 B의 엄마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B의 엄마는 울먹이며 내게 말했다.
“어제 내가한 말을 A가 오해한 것 같아.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A말만 듣고 우리 착한 아들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마구 화를 내더라고. 내가 생각할 때는 내가 틀린 말을 한 게 없거든? 어른들은 다 그래. 여자가 결혼을 하면 그게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 하겠지만 다, 기대하는바가 있는 법인데... 아마 A네 부모님은 아들이 없어서 그 기분을 모르시는 것 같지만...”
B의 엄마는 말하며 중간 중간 눈물을 훔쳤다. 그런 자신의 엄마를 C가 다독였다. B의 엄마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C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C도, 사실 우리 B랑 C가 그냥 남매간이 아니었어. 둘이 정말 친하고 사이가 좋았는데, B가 결혼하고 나서 C도 오빠를 뺏긴 것 같고 많이 서운한 감정이 있어, 그렇지?”
C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의 어깨를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우리 가족들이 새로운 가족을 맞이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 가족을 빼앗기고 말았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저 들에게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논리적인 반박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제대로 된 반박을 한들 이미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른을 이길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사죄할 수도 없었고 반박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야만했다.
애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분명 그는 이 일을 전부 해결했다고 했지만, 내 눈 앞에 있는 그의 엄마와 동생은 더 심각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내가 그 단란한 가족관계를 망치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그 순간 놀랍게도 내 머릿속이 너무나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녹음 버튼을 눌렀다. 이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그의 엄마와 동생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의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사실 A가 임신했다고 결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결혼을 반대하려고 했었어. 우리 B,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우리 B가 발목 잡힐까봐. 그런데 내가 이 결혼을 찬성하게 된 이유는 바로 C 때문이야.”
머리를 큰 망치로 얻어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그 말을 듣고 있었던 나는 당시 임신 6개월 차였다. 머리가 하얘졌다. 하지만 곧 놀랍게도 내 머릿속은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내가 이 대화를 녹음하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칭찬하며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일의 증거를 모두 남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C, 너도 알겠지만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잖니. 내가 차라리 애를 지우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니까 C가 나한테 울면서 그러더라고. 엄마, 저 애는 죄가 없어요. 애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 말을 듣던 C가 갑자기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얼어붙은 내 앞에서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 나는 대체 무슨 죄가 있어 임신 6개월에 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말을 들어주고 있어야 하는가. 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지은 죄는 명확했다. B와의 결혼을 선택한 것, 그 것이 나의 죄였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녹음이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 상황을 그의 엄마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의 엄마는 나의 손을 잡아들더니 C의 손에 포갰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우리C도 새언니한테 할 말이 있지?”
“...우리가 편하게 지냈긴 했지만 너무 그렇게 예전처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 저한테 아가씨라고 불러주세요.”
아가씨. 아가씨. C 아가씨.
“그리고 우리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게 좋겠어요.”
당연히 C와 나의 관계에서 반말을 하던 것은 나뿐이었다.
“네, 아가씨.”
내 대답에 그들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내 집을 떠나갔다. 아마 그들은 나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런 줄 몰랐으니까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그에게 전했다. 그는 나에게 재차 물었다.
“정말? 나랑 전화할 땐 그렇지 않았어. 게다가 C? C가 그렇게 말했다고?”
“왜 내말이 안 믿겨?”
“아니,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정말 나는 우리 가족들이 그런 줄 몰랐으니까...”
나는 오늘 겪은 그 일보다 오히려 그의 반응에 더 화가 났다.
“왜, 내말이 믿기지 않아? 내가 얼마나 황당하면 그 자리에서 녹음을 했어. 분명 나한테 하는 행동이랑 너한테 하는 행동이 다를 테니까.”
“뭐? 녹음?”
그는 내가 그 상황을 녹음을 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어, 그렇게 까지 해야지. 내가 그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네가 내 마음을 알기나 해? 그래, 좋아. 그 전통 좋다 이거야. 그래서 너는, 너희 가족들은 그 전통에 따라서 지킨 게 있긴 해? 상견례에서 했던 말 기억나지? 요즘 세상에 남자가 여자가 어디 있냐면서 결혼 준비도 반씩 했어. 회사 다녀서 돈 벌어오는 것도 나야. 넌 뭐야? 네가 그래서 집안일 해? 왜 나한테만 그 잘난 전통을 들이미는 건데? 할 거면 한 가지만 해야지!”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뭐라고?”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내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또 다시 시작이었다. 집은 엉망이 되었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나도 질세라 함께 화를 냈다. 하지만 곧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멍해졌다. 곧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양쪽 모두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진 상태였다.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나 너무 힘들어.”
그는 쓰러져 있는 나를 비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힘들어? 아파?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갑자기 그가 전화를 들었다.
“내가 구급차 불러줄게. 병원까지 못 가겠지? 구급차 불러 줄 테니까 타고 가.”
무서웠다. 내가 쓰러졌다고 그가 사과를 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바란 것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잠시 안정을 취하면 분명 괜찮아질 것 같았다.나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상황을 다른 사람이 보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아니야! 그러지 마, 그렇게 안 해도 돼.”
“왜?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너 지금 못 걷잖아. 안 그래?”
그 표정엔 걱정보다 비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비참한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구급차가 온다면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상황을 알게 될 것이 뻔했다. 무서웠다. 나는 그를 계속해서 말렸다. 제발 그냥 나를 그대로 두라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나를 냉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119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는 그의 태도와 말투는 깔끔했다.
“저희 아내가 임신 중인데요. 지금 갑자기 쓰러져서요. 네,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아요. 아, 주소는...”
나는 그가 무서웠다. 얼굴 하나 바뀌지 않고 119에 신고를 하는 그에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껴졌다.
“그러지마. 왜 그래...”
“내가 뭘? 너 아프잖아. 게다가 너 임산부 아냐?”
그는 내가 무슨 반응을 보여도 끄떡도 없었다. 그는 마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벽과 같았다. 결국 잠시 뒤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로 나는 구급차에 실려 집을 떠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