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탈혼기 8. 위자료를 받기 위해 결혼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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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탈혼기 8. 위자료를 받기 위해 결혼한 여자

Jane Doe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석 달 뒤 나는 다시 B와 함께 관할 지방법원에서 만나야 했다. 나는 법원에서 보내온 문자가 알려준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사람들은 붐볐고 언뜻 보기에는 어수선했지만 이 모든 일들은 규칙이 있었다. 마치 대학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곁눈질로 이 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혹시라도 오늘 마음이 바뀐 B가 이 자리에 오지 않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직 B는 오지 않았다. 원래 일찍 오는 사람은 아니니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누르려 애썼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설마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닐까. 혹시 이 일을 까먹은 것은 아닐까. 나는 계속 문을 보고 앉아있었다. 한참 뒤 정해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도착했다.

‘다행이다. 할 수 있구나.’

나는 그가 온 것을 확인 한 뒤 고개를 푹 숙였다. 그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서 약 20분 정도가 지난 뒤 담당자가 나와 B의 이름을 불렀다. B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란히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나와 B의 신분증을 확인 한 뒤 판사가 물었다.

두 분이 합의 하에 이혼하는 것이 맞으십니까?

우습게도 나는 그 순간 바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순간 내가 먼저 대답하는 것이 혹시라도 B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먼저 대답한 것은 B였다. 나도 뒤따라 대답했다. 이혼은 성립되었고 판사는 서류를 넘겼다. 이 과정이 끝나자 비로소 나는 한 장의 종이를 쥘 수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종이를 구청에 내밀었다. 일주일 뒤 나는 문자를 받았다. 내가 이제 법적으로 더 이상 결혼한 상태가 아니며, B가 내 가족이 아니게 되었다는 문자였다.

화가 났다,
억울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B가 없어지자 내 인생은 확실히 예전으로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부모님 집은 다시 우리집이 되었다. B와 살던 집은 이제 B의 집이 되었다. 내 삶은 다시 안정을 되찾은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종종 화가 났다. 그 기억은 시시때때로 나를 힘들게 했다. B와 함께 살았던, 그와 그의 가족이 내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화가 났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가빠오고 눈물이 났다. 생각해보니 나는 B와 함께 살면서 그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고통의 결과로 내가 얻은 것은 예전으로 돌아온 나와 나의 아이뿐이다. 억울해졌다. 나는 내 고통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조금도 받지 못한 채 돌아왔다. 결국 나는 B의 유책사유와 나의 경제적 기여도를 물어 위자료를 청구하는 내용 증명을 보내기로 했다. 이미 B는 자신의 잘못을 대부분 인정했다. 게다가 나는 아이를 전담해 양육하고 있었다. 나는 변호사를 찾아갔다. 변호사는 10만 원 정도를 받고 내용 증명을 작성해 주었다. 변호사는 내가 B와 산 기간도 짧고 내가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지 않았기에 1000만 원에서 500만 원 정도의 위자료가 적절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내가 청구한 금액은 재산 분할과 위자료를 고려하여 3500만원. 그다지 크지 않은 액수였다. 그리고 내용 증명을 보낸 지 일주일 뒤, B로부터 전화가 왔다.

“뭐야. 돈 문제는 깔끔하게 처리하자고 했잖아?”
“생각하기에 타당한 금액으로 깔끔하게 처리한 거야. 분명 처음에 이혼 얘기 나올 때 위자료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가 먼저 물어본 적도 있지 않았어?”
“난 돈 없어. 주고 싶어도 못 준다고. 그래. 위자료 줘야지. 줄 건데 지금은 못 줘.”
“그래? 그럼 어떻게 줄 건지. 어떻게 천천히 줄 건지 서류로 만들어 보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전화는 끊겼다. 나는 B가 마지막 남은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적정한 선에서 위자료를 처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혼 당시 자신의 유책사유를 인정하던 B는 나로 인해 혼인이 파탄에 이르렀다며 도리어 위자료를 청구해왔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B가 적어 놓은 나의 유책사유는 다양했다. 그 내용은 마치 아침 드라마 같았다. B는 내가 과거 임신 중절 경험이 있다며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또 내 성격이 괴팍하여 내 친구들의 남편과 상대방을 비교하여 정신적 학대를 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 뒤에는 내가 일을 하느라 나의 부모님께 맡기는 등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않았다고도 했다. 또 별거 기간 중 당신들의 생일과 기념일 그리고 명절을 챙기지 않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는 내가 사들인 살림과 가구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심지어 내 친구가 사준 선물까지 자신이 구매한 것이라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가족을 무시했으며 도련님이나 아가씨와 같은 호칭도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 뒤에는 내가 애초에 결혼해서 B의 가족과 하나 될 마음이 없었으며- 단지 나, A는 (현재 내 연봉도 안 되는 금액의) 위자료를 받기 위해 결혼한 여자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분명 이 서류는 B가, 아니 B의 가족이 고용한 법률 대리인의 이름까지 적혀있는 완전한 서류였다.

“J야. 지금 바쁘니?”
“내일 시험이긴 한데 왜, 무슨 일 있어?”

B의 서류를 받고 내가 처음으로 전화를 건 사람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 미래의 고문 변호사라고 불렀던 고등학교 친구였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맙게도 그는 시험을 뒤로 하고 곧바로 내게 달려왔다.

길고 지루한
싸움의 시작

“삼겹살 2인분 하고, 소주 한 병이요.”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나와 J는 근처 구이집으로 향했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시끄럽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 혹여나 내 감정 변화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 만한 곳에 가고 싶었다. 나는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고기가 다 구워질 때쯤 J는 모든 서류를 다 읽었다. 고기를 구우면서 난 계속 J의 움직임을 살폈다. 누군가 이 내용을 보고 나와 빨리 공감해 주기를 바랐다.

봤어? 거기 맞춤법 틀린 거? 이걸 변호사가 법원에 막 내도 돼?

화가 나기도 황당하기도 한 나의 표정에 J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냥 이 변호사에게 의뢰인이 돈을 냈고, 변호사는 돈을 받아서 수임했어. 의뢰인이 써달라는 내용을 써 준거야. 영혼 없이.

증거도 없고, 거짓말인 내용을 그냥 써준단 말인가? 나는 되물었다. 

“자, 너의 경우에는 상대방의 거짓을 입증할 증거가 꽤 있다고 하지만, 뭐 물건 산 영수증이랑 네 통장 거래 내역은 잘 남아 있으니까. 그래도 대부분은 불가능하잖아. 예를 들어 상대방이 너희 애 젖병을 대부분 물렸다고 적혀있는데, 넌 1년 내내 모유수유 했잖아. 젖병 물린 날은 거의 없고. 자. 너 모유수유 했다는 거 증거로 낼 수 있어?”
“아니.”
“애초에 다 걸러서 듣게 되어있어. 그냥 뭐라도 하나 걸리라고 흠집 내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틈에 고기는 알맞게 익어가다 못해 바삭바삭해지고 있었다. 나는 판 가운데에 있는 고기를 모서리로 밀어 놓았다. J는 내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한 잔 해.

머리가 멍해졌다. 싸구려 인터넷 기사나 잡지,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내용들이 내 눈앞에서 팔랑거렸다. 술잔을 쥐었다. 소주 잔 밑에 그려진 웃는 얼굴의 여자 연예인이 잘게 흔들렸다.

“이거 언제쯤 끝날까? 나 이거 소송하면 걔 봐야 되는 거야?”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내 변호사 시험 전에는 끝나지 않을까? 뭐 그 쪽 얼굴은 안보고 끝낼 수도 있는데, 보게 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고......,”
“잠깐, 너 내년 말에 시험 보는 거 아냐?”

내 물음에 J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 몇 점을 주워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일단 내일부터 좀 돌아다니면서 변호사를 알아봐. 상대가 변호사를 선임한 이상 혼자서 하는 것 보다는 변호사와 하는 게 나아.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나는 변호사를 찾아 갈 수 없었다. 신경쓰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스트레스성 위염 때문이었다. 대신 부모님이 몇몇 사무실에 전화를 한 뒤 상담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지치지도 않는 지 집 전체를 쑤시며 돌아다녔다. 뭔가 작은 일이라도 생길지 몰라 다급한 내 눈은 쉬지 않고 아이를 쫓았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한참 시간이 지나고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아파서 그런지 아니면 서러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눈에서 애를 놓칠까봐 그만 눈 깜빡거리는 것을 잊어버려서 그랬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게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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