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때 주 90시간을 일한 적이 있었다. 간혹 새벽에 술 한 잔을 하고 퇴근하기도 했는데, 와이프가 기다려서 먼저 들어가겠다는 과장님에게 상무님은 "네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상 가족들은 희생하는 게 맞는 거야!" 라며 호통을 쳤다. 그렇게 일하다가 하루는 침대에 쓰러져 자면서 이대로 난 결혼도 할 수 없고 아기도 가질 수 없겠지, 생각했다.
그 회사에 아기 엄마들은 극히 드물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아기 엄마들더러 다들 독하다고 했다. 그 드문 아기 엄마 중 한 분 밑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이사님은 회의실에서 아이와 통화를 하고 돌아오면서 "난 정말 나쁜 엄마야" 라고 한숨을 쉬었고 나는 아니라고, 나는 밤 10시 넘어서 퇴근하고 주말에도 일하는 엄마 밑에서 자랐지만 단 한 번도 엄마가 일하는 게 싫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다.
"저는 저희 엄마가 일하는 게 엄청 자랑스러웠어요. 이사님은 훨씬 성공하셨잖아요. 아드님이 나중에 이사님 자랑 많이 할 거예요."
"그럴까? 우리 아들도 나 일하는 거 좋아할까?"
이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동기 중에 여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런 분이 회사를 다니는 문제로 후회하고 고민하시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다.
몇 년 뒤 이사님은 상무를 거쳐 전무로 승진하셨다고 한다. 그 분 밑에서 일하던 어느 날, 저녁에 컨퍼런스 콜을 진행하는데 이사님의 회선에서 아이가 엄마를 찾는 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난다. 옆에서, 그렇게 해서까지 회사를 다녀야겠냐고 하던 부장님 말도 생각난다. 그러게요, 그렇게 해서까지 그 분은 전무가 되셨네요. 여자로는 드물게.
몇 년 뒤 나는 결혼도 하고 아기도 가졌다. 일은 좀 더 현실과 타협하는 쪽으로 바꿨지만 계속 할 생각이다.
2
나의 직업은 프로젝트마다 달라서 밤 10시 전에도 종종 퇴근할 수 있기는 했지만, 저녁이나 주말 약속을 미리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직업은 야심찬 남자들이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다른 해외 지사를 봐도 애초에 시간 외 근무가 잦은 회사였다. 열심히 일하면 빠르게 연봉이 오르고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는 분이 업계 최연소 여자 임원이었다.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아이가 좀 유별났다. 다들 엄마가 일을 해서 애가 저렇게 된 거라고 수근댔다. 하지만 아이가 엄마만을 찾으며 결혼식장에서 내내 징징대는 동안 남편은 없었다.
주 90시간 근무는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존재한다. 남자들은 야심차게 선택한다. 가족에게 양해를 구한다.
여자는 그러면 안 돼? 여자는 야심차면 안 돼?
3
몇 년 뒤 그 아이를 다른 결혼식장에서 또 봤다. 엄마 없는 자리에서 아이들 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있을 때만 어리광을 피우는 것이었다. 하도 유별나서 미간을 찌푸리게 했던 행동들은 이제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시계와 규칙이 존재한다. 같은 엄마 밑에서 자라도 저마다 기질이 다르다.
엄마 탓은 쉽다.
4
난 외할머니 손에서 쭉 컸는데, 4살 때 쯤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며 안 자고 버티다가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잔 적도 있다. 하얀 바탕의 시계바늘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5
엄마가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었다.
남들이 엄마 손을 빌려 강낭콩 성장 '그래프'라는 걸 그려갈 때, 난 강낭콩 모양을 매일 깨알같이 빼곡히 그려서 가져갔다. 우리 반에서 그래프가 아닌 그림을 그려간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한 번은 별자리 숙제가 있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종이에는 "밤하늘을 그려보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혼자 밖에 나가서 하늘을 봤다. 하늘이 까맸다. 별이 아주 조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한 장 가득 까맣게 색칠하고 별 모양을 군데군데 찍어서 가져갔다. 별자리가 아닌 그림을 그려간 아이는 또 나밖에 없었다.
집에 가끔 파출부 아주머니가 오셨다. 어느 날 "파출부 아주머니가 실수로 숙제를 버리셨어요"라고 말한 후, 내 실내화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렇게 나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집에 오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같은 반 친구에게 왜 몇몇 아이들이 나를 미워하는지 물어보았고, 내가 아주머니가 있는 집이라고 자랑해서, 잘난 척해서 그런 거라는 답을 들었다. 일주일에 딱 두 번, 5시간만 일하고 가시는데, 친구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입주 아줌마 같은 걸 상상했던 것 같다.
간혹 나더러 엄마 밥을 못 먹고 커서 안쓰럽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엄마 밥은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출부 아주머니가 해주는 밥이 훨씬 맛있는데. 굳이 엄마 밥을 왜 먹어야 하지? 엄마는 엄마가 잘하는 거 하면 되잖아.
한 번은 선생님이 다음 주에는 전원 엄마를 모시고 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 엄마는 못 오는데요."
"왜?"
"우리 집엔 엄마가 없어요."
아이들의 언어는 너무 쉽게 중요한 부분을 건너뛰곤 한다. 결국 엄마는 다음 주가 아니라 그 주에 바로 학교를 찾아오셔야 했다. 지금이야 웃으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그 때 엄마의 가슴은 얼마나 크게 철렁 내려 앉았을까.
아, 물론 아빠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다. 우리 아빠는 내가 몇 학년 몇 반인지도 몰랐거든.
6
워킹맘 밑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 꼭 자기는 아이를 엄마 손으로 키워야지, 하고 마음 먹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꼭, 우리 엄마처럼 일하는 엄마가 되어야지, 라고 내가 생각하는 만큼 말이다. 엄마가 전업주부인 것도, 워킹맘인 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그저 그런 삶들이 각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숙제를 해주지 않아서 혼자 그림을 그려갔던 게 재밌었고, 파출부 아주머니가 멋진 음식 솜씨로 밥을 차려주셔서 맛있게 식사할 수 있었던 게 좋았고, 캠프에 가서 엄마 없이도 이것저것 할 수 있는 내가 좀 괜찮다고 생각했다. 워킹맘의 아이들에게도 나름의 자부심이라는 게 있다.
나는 엄마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이 자리에 그 사랑을 다 쓸 수 없는게 아쉽다- 그것은 엄마가 물리적으로 아이 옆에 붙어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임을 확신한다. 우리 엄마는 엄마가 가장 잘하는 걸 나에게 보여줬다. 아이들은 엄마가 어떤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보는지 안다. 난 특히 우리 엄마가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던 게 좋다. 엄마에게는 미안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