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프로불편러 2. 가난한 비혼주의자가 집을 사는 방법

생각하다주거결혼과 비혼

기꺼이 프로불편러 2. 가난한 비혼주의자가 집을 사는 방법

[웹진 쪽] 화랑관장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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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프로불편러>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래서 정치적인 일상속 가부장제의 허세를 가볍게 비트는 이야기.

 

나는 비혼주의자다. 비혼의 삶을 적극적으로 택했다기보다는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해 비혼주의자다. 그런데 그 비혼주의, 더 못할 수도 있겠다. 결혼할 이유가 생겼으므로. 나는 집을 좀 사야겠다.

일러스트 이민

꿈의 집을 사려면

    이 집은 동쪽으로 난 큰 창으로 사시사철 나무를 볼 수 있는 집이다. 창으로 나무를 볼 수 있는 집, 내 오랜 드림하우스다. 집 앞에 작은 대나무 숲이 있고, 그 앞으로 무려 '불국사'라는 이름의 절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눈 오는 날 자그마한 대웅전 기와에 쌓인 눈은 세상 모든 운치를 가져다줄 것이다. 이 집은 3층밖에 되지 않고 지은 지 40년 된 연립주택이지만,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도심을 굽어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뜨끈한 차 한 잔을 후루룩 마시며 그 풍경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해본다. 가슴이 뛴다는 건 그런 걸까. 아! 나는 진정 그 집에 살기를 원한다. 아니 염원한다.

4억, 그 집은 4억이다. 18평에 4억. 평당 2천만 원을 웃도는 셈이다. 머릿속에 퍼뜩 '이 정도면 괜찮은데?’ 싶다. 서울 집값이 하도 억억 거리니, 수중에는 억이 아니라 백도 없는 주제에 마치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기만 하다. 현금 4억은 내 평생 만져볼 수 없는 액수인 듯하지만 서울에서 산이든 강이든 전망을 확보하고 산다는 건 소위 있는 자들의 영역임을 상기하면, 빚을 내서라도 사야겠다 싶다.

그리하여 나이 ‘곧 사십’의 미혼 단독세대주인 내가 생애 최초로 서민 지원 대출인 이른바 디딤돌 대출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희망의 불씨는 불꽃을 경유하지 않고 순식간에 거대한 불길이 되어 솟구쳤다. 내 드림하우스가 귀 옆에 찰싹 붙어 얼른 오라 속삭인다. 드림하우스야. 조금만 기다려.

대출, 안 됩니다

신속하게 은행 대출 코너를 찾았다. 매사 느긋한 내게서 일찍이 본 적 없는 분주함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대출 상담 직원을 마주했다. 상담 직원은 내 뜨거운 희망에 냉각수 한 바가지를 붓더니 급기야 양동이째로 들이붓는다. 대출 못 해주겠단다. 30세 이상 미혼 단독 세대주에게는 3억이 넘지 않는 선에서 18평 이하의 집에 한해서만 대출을 해 줄 수 있단다. 서울에서 3억이 안 되는 살 만한 18평 찾기, 쉽지 않다. 

다만 내가 신혼부부라면 원하는 조건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딱밤 한 대를 세게 맞은 듯 기분이 더러웠다. ‘아이씨, 까짓것 서류상 결혼을 해?’ 귀 끝에 간신히 매달린 내 드림하우스가 속삭인다. ‘뭘 고민하니? 집 사고 이혼하면 되잖아.’

일러스트 이민

결혼할지도 몰라

곧장 애인에게 나와 함께 살 의향이 있는지, 가진 돈은 얼마인지, 혹시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내 훌륭한 애인은 결혼 제도를 우롱할 수 있는 이벤트에 흔쾌히 수락할 것처럼 반응했다. 그의 반골 기질과 나의 집에 대한 욕망이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그는 집을 사기 위해 자신을 이용할 셈이냐며 귀엽게 항변했다. 나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비로소 나와 공조할 준비가 되었다.

모친에게도 운을 뗐다. “엄마, 나 어쩌면 결혼할지도 몰라.” 수화기 저편의 모친 음성이 갑자기 둥실거린다. ‘과년한’ 딸이 토끼 같은 자식 낳고 알콩달콩 정상 가족을 이뤄 살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모친이다. “엄마, 그런데 식은 안 올릴 거고 집 사면 이혼할 거야.” 수화기 저편의 모친이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 피식 웃더니 깊은 한숨을 내쉰다. 

당장 결혼할 것처럼 굴긴 했지만, 결혼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어지간히 걸쩍지근한 게 아니었다. 과연 내가 제도를 이용하는 건지, 제도에 놀아나는 건지 헷갈렸다. 주거 복지 정책은 나날이 미혼 단독세대주의 혜택을 줄이고 신혼부부에게 훨씬 유리한 대출 조건을 제공하고 있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국가로부터 벌점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아무리 이혼을 가정하더라도 정부의 통계에 추호도 보탬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혼의 벌점

며칠 뒤 다시 은행을 찾았다. 금리가 더 높지만 결혼을 하지 않고 내가 사고 싶은 집을 담보할 수 있는 대출을 알아봤다. 연이자 3.5프로, 30년 상환이 좋겠다. 비록 그 빚 다 갚는 날이 오면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겠지만 말이다.

1인 가구가 이동통신 개발 속도에 맞먹을 정도로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미혼의 삶에 벌을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정부의 정책이 국가 현실과 이토록 모순적인 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국가는 모르지 않는다. 결혼을 해야 할 유일한 이유가 안정적인 주거인 싱글 세대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나는 볕이 잘 드는 큰 창으로 사시사철 나무를 보는 삶을 포기할 수 없다. 또한 소득이 낮기는 마찬가지인데 단지 혼인 여부로 저금리 대출을 못 받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 바라는 게 너무 과한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 집이 팔린다면 나는 한동안 가슴이 많이 아플 것 같다. 행여 내가 그 집을 샀다는 소문을 듣거든, 아무것도 묻지 마시라. 때가 되면 이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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