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고 버리는 옷장 미니멀리즘

생각하다주거

벗고 버리는 옷장 미니멀리즘

유의미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애인과 몇 달간 집을 바꾸어 살아본 적이 있다. 서로의 집에서 출퇴근이 더 편리했고, 고양이를 애인이 대신 봐줄 때였다. 나는 급하게 움직이느라 당장 필요한 옷 몇 벌과 화장품, 신발 두어 개, 노트북만 가방 몇 개에 나눠 들고 갔다. 어차피 서로 왔다 갔다 할 테니, 일단 이사부터 가고 중간에 필요한 게 생기면 한 번 더 가져오려고 했다.

그 집은 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들여놓은 게 없었고 휑하니 텅 비어 있었다. 기본적인 세면도구와 식기 몇 개, 청소도구는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가구도 침대와 냉장고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살아서 엉망진창인 내 집보다 훨씬 아늑하고 깔끔했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옷을 가지런히 개켜두고 침대에 누웠다. 낯선 곳에 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날은 왠지 두근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잠들었다.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 같았다.

빈 집

그곳에서는 퇴근하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빨래를 돌린 뒤, 오면서 사 온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를 먹었다. 먹고 남은 쓰레기는 다음날 출근하면서 버릴 수 있도록 봉투에 모아 정리해두고, 청소기를 돌렸다. 빨래까지 널면 남은 시간은 얼굴에 팩을 하거나 손톱을 칠하거나 책을 읽으며 보냈다. 가끔은 주변을 산책하거나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열두 시가 되기 전에 전기장판을 켜고 누웠고, 언제나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기분이 들었다. 출퇴근 시간은 변한 게 없고 거리가 그렇게 가까워진 것도 아닌데, 일상의 감각은 매우 달랐다. 집안일을 특별히 더 열심히 하지도 않는데, 집이 더러워지지 않았다. 늘 청소기만 돌리면 깨끗해 보였다. 밥을 안 해 먹으니 설거지나 음식물쓰레기가 쌓이지도 않았다. 옷이 몇 개 없으니 빨래는 금방 널었고, 선택지가 별로 없으니 다음 날 입을 옷도 크게 고민할 게 없었다. 가방도 신발도 몇 개 없으니 계속 들던 거 들고 신던 거 신었다. 그러다 문득 짐을 한 번 더 옮기려 했던 게 생각났다. 난 뭘 가져오려 했던 걸까? 이사 전에는 분명 필요해 보이는 게 많았는데, 이미 떠나서 눈에 안 보이니까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살면서 뭐가 없어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적도 없었다. 더 필요한 것 없이 그대로 잘 지낼 수가 있었다.

꽉 찬 집

생각보다 그런 게 나를 자유롭게 했다. 원래 살던 집에 있을 때엔, 퇴근하면 일단 입었던 옷을 벗어둘 데가 마땅히 없다. 옷장이랑 행거가 꽉 차서 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당장 자리를 만들어서 정리해두기엔 귀찮아서 대충 걸어둔다. 그리고 엊그제부터 이렇게 대충 여기저기에 둔 옷들을 주워다 세탁기에 넣는다. 저녁을 뭐 해 먹을지 고민하고, 만들고 먹고 치우고 설거지한다. 냉장고를 여닫다 보면 오래된 반찬이 눈에 띈다. 버려야겠다고 마음속으로만 다짐하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간식들을 꼭 지금 먹고 싶지는 않아도 먹어 치운다. 청소하려면 방안 여기저기 놓여있는 작은 소지품들을 다 정리해야 비로소 청소기를 돌릴 수 있는데, 탁 트인 빈 곳이 아니라 가구도 있고 물건도 있어서 구석구석 비집고 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힘이 들어서 주말로 미룬다. 세탁기가 다 돌아갔지만, 건조대에 마른빨래가 많아서 일단 옷을 걷어서 갠다. 옷이 많기에 돌린 빨래도 많고, 또 한참을 다시 널어야 한다. 갠 빨래를 넣어두려 옷장을 열고 보니 작년에 입었던 외투가 보인다. 언제 그랬는지 어깨 부분이 조금 찢어져 있다. 사실은 이미 알지만 계속 미뤘다. 추워지기 전에 어서 수선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주말에 시간이 있으면 가기로 다짐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아침에 출근할 때도 그렇다. 바람이 생각보다 좀 차서 어젯밤에 정해둔 옷을 못 입을 것 같다. 이것저것 입어보다 ‘아, 그때 그 카디건 어디 갔지?’ 하며 시간을 보낸다. 옷이 많아서 꺼내기도 어려운데 꺼낸 옷을 다시 넣기도 어렵다. 천천히 정리하기엔 늦을 것 같아, 고르느라 이미 꺼낸 옷들은 일단 대충 다시 걸쳐둔다. 이따 집에 와서 치워야겠다. 피부화장을 하면서 이번 주엔 진짜 퍼프랑 붓을 빨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눈화장에 필요한 화장품은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있고 자리도 좁아서 화장대를 비집고 꺼내다 보니 짜증이 난다. 이번 주에 진짜 한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마스카라도 좀 굳어가니까 새 걸 사야겠고, 아이라이너도 하나는 버려야 하는데, 둘 중에 뭐가 잘 되는 건지 모르겠으니 이따 와서 한번 살펴보고 버려야겠고, 섀도도 쓰지도 않는 색깔이랑 약간씩 깨진 것들도 싹 정리해서 버려야 되겠다. 아니 그건 그렇고 크림도 왜 이렇게 많아.’

당연히 쓰레기를 버릴 시간도 없이 급하게 뛰쳐나간다. 돌아와서 쓰레기를 버려야겠다고 또 생각한다. 벌써 집을 나가면서 ‘이따 와서 할 것들’의 목록만 잔뜩 생긴 것이다. 퇴근하고도 ‘주말에 할 것들’의 목록만 생겼는데, 일상이 스트레스로 가득하게 느껴진다. 퇴근하고 주변을 산책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겠지만, 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엔 마음만 불편하다. 그렇지만 온종일 일하고 왔으니 기력이 없어 할 일 목록을 처리하지 못하고, 누워서 핸드폰만 붙잡고 뉴스나 보다가 열두 시가 넘어 허겁지겁 잘 준비를 한다.

옷이 몇 개 더 있는 것과 냉장고에 식재료가 조금 더 있는 것, 방 안에 가구나 물건이 몇 개 더 있는 것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런 식으로 내 일상을 지배했다. 아무것도 없던 집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나니, 미니멀리스트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한 구절에 격렬히 공감할 수 있었다.

물건의 수가 줄어들면 어질러지는 일 자체가 줄어든다. 내 방에는 물건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제 어질러지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어질러진다는 개념이 아예 없는 상태다.

사사키 후미오의 집에는 가구가 옷장과 탁자, 의자밖에 없다. 나도 좀 덜 어지르고 살고 싶지만, 그렇다고 당장 모든 걸 갖다 버릴 용기는 또 없었다. 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필요할 때 금방 다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안 쓰는 화장품을 다 버리고 딱 한 개씩만 남겼다가 혹시 술 먹고 파우치를 통째로 잃어버리면 어쩔 것인가?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하다! 돈이 많다면 새로 다 사겠지만, 수중에 돈이 없으면 큰일이다.

그래도 필요한 것만 적게 갖는 것은 내가 가진 가장 쿨한 선택지다. 난 어차피 많이 가지려면 돈이 부족하다. 게다가 내가 자꾸 물건을 사면 공장이 돌아갈 것이고 지구가 파괴될 텐데, 아예 적게 갖기로 하면 좀 덜 살 것 같다. 지구 파괴를 막는 그 첫 단계로 물건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좀 미심쩍긴 하지만, 대신 이제부터 다시는 안 사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조금씩 버리기로 했다.

버리는 정리법

난 각종 페미니즘 행사에서 배지와 스티커 같은 걸 모아오고, 여행 가면 꼭 기념품을 사 오고, 선물을 받으면 케이스도 못 버리는 사람이어서 쉽지 않았다. 곤도 마리에의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에는 설레지 않으면 모두 버리는 정리법이 나온다. 하나하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버리지 않을 이유를 주로 찾게 되니까, 물건을 가만히 만져보고 드는 기분에 따라 버리는 방법이다. 실제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물건이라거나, 취향이 아닌데 어디서 받았거나, 이제 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면, 대면했을 때 마음이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책에서 제일 먼저 옷장을 정리하라고 해서, 나는 백 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사 왔다.

옷장을 다 뒤집어 옷을 꺼내고, 하나씩 집어 들었다. 대체로 아무 기분도 들지 않았으나 새로 산 옷과 촉감이 좋아 자주 입는 옷은 만져보니까 확실히 기분이 좋았다. 그 뒤로 기분이 좀 더 명확해졌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는 옷들을 다 쓰레기봉투에 집어 던졌다. 대부분은 엄마가 사준 옷이었다. 엄마는 한동안 여성스러운 옷을 사줬다. 힘들게 쇼핑한 엄마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날 위해 사다 준 게 고맙기도 해서 입고 다녔다. 특별히 안 어울리지도 않았고 입으면 예뻐 보여서 싫지도 않았지만, 내가 직접 쇼핑한다면 사지 않을 옷들이었다. 그 옷들은 레이스가 거추장스럽거나 소재가 까슬까슬하거나 허리선이 들어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서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옷장을 꽉 채운 그 옷들이 내가 직접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고민하고 고를 기회를 빼앗아갔다.

일할 때 입던 옷들도 쓰레기봉투에 던졌다. 그 일을 좋아했고 언제 또 할지 몰라서 갖고 있었다. 다시는 안 한다고 해도 왠지 간직하고 싶었는데, 사실은 싫기도 했나 보다. 성노동이었다. 돈 받고 일을 하는 건 원래 싫지만, 유난히 지긋지긋한 기억이 비어져 나온다. 다른 일은 싫은 점을 불평하며 잊어버렸는데 이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웃으며 좋은 점만 얘기해야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는 걸 믿어줄 것 같았다. 그때 입던 홀복을 집어 드는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늘 그걸 입으면 숨이 막혔다. 44사이즈를 한 번 더 줄여 꽉 조이게 입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아직 가지고 있던 고등학교 교복도 버렸고, 다시는 입지 않을 스키복도 버렸다. 다들 예쁘다고 했던 교복이지만 이 옷도 언제나 가슴을 조였고, 나는 살면서 다시는 스키를 타지 않을 것이다. 움직이기도 싫고 추운 것도 싫어한다. 회사 다닐 때 입던 포멀한 블라우스나 스커트도 다 버렸다. 앞으로 그런 옷을 입어야 하는 직장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 회사 생활과 맞지 않는다는 걸 이미 예전에 알았지만, 확신할 용기가 없어서 망설였다. 전부 그동안 몇 번이나 버릴까 말까 고민해서 그런지, 집어 들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다 미련이었다.

쓰레기봉투를 다 채웠지만, 가차 없이 버리지는 못해서 여전히 옷장은 차 있다. 괜히 입을 옷만 없어진 것 같기도 하다. 남은 옷을 들여다보니 나는 부드러운 천과 흐르듯이 떨어지는 핏을 좋아하나 보다. 와인이나 블랙 같은 짙고 어두운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밝은 하늘색이 잘 어울리는 것도 발견했다. 옷은 생각보다 많은 걸 말해준다. 어떤 옷을 입으며 살고 싶은지 결정하고 나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렇게 어제보다 조금 덜 혼란스러울 이유를 만들어 기쁘다. 어딘가에 소속되기도 아예 고립되기도 두려운 나는 어떻게 살아갈지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계속 정돈하고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며 단출하게 기분 좋은 하루하루를 꾸려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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