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하기 좋은 날 프롤로그. 30대, 여성, 비혼, 소속 없음

생각하다독립결혼과 비혼

비혼하기 좋은 날 프롤로그. 30대, 여성, 비혼, 소속 없음

윤이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평소와 같은 날은 아니었다. 문제의 전화가 걸려온 날, 나는 당시 살고 있던 망원동에서 한참 떨어진 강남의 한 아이엘츠 전문 어학원에서 오후반 수업을 듣고 있었다. 평소라면 일을 시작하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시간에, 팔자에 없는 영어 논술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에 아무 대책없이 일단 한 번 지원했던 영국의 대학원 몇 군데에서 봄과 함께 합격 연락을 전해왔고, 가을 입학을 위해서는 여름까지 영어 시험 성적을 제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글쓰기라는 기술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기술을 가지고 지금까지 잘도 버텨냈다 싶었던 즈음, 여기,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더는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작정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는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그럴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색이 다른 여권 만이 나의 신분을 증명해주는 곳에서 현지 언어 능력마저 부족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만 서른의 나이에 호주에서 차고 넘치게 경험하고 돌아온 터였다. 일단 안정적인 비자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학생 비자로 시작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흔이 넘어서 런던으로 석사 유학을 간 지인을 떠올리며, 1년에 석사학위 취득이 가능한 영국을 찔러봤는데, 덜컥 합격해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영국이 미친 환율인 파운드의 나라이고, 내게는 당연히 유학 자금이 될 만큼 모아둔 돈도, 그 돈을 대줄 수 있는 부모도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 있는 것은 일단 언제든 나갈 수 있게 보증금 없이 지내고 있는 월세 35만 원 짜리 작은 방과, 얼마 되지 않는 현금과, 자주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는 늙어가는 부모 뿐이었다. 

그런데도 내 안에서는 ‘여름에 공개될 드라마가 잘되면 혹시 몰라’ 같은 로또나 마찬가지인 말들이 어설픈 악마의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혹시’라든가 ‘어쩌면’ 같은 대책없는 마음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점수를 일단 따자’라는 상태가 되어 강남의 영어 학원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듣는 사람마다 놀라는 턱도 없이 높은 점수를 따야했기에, 솔직히 새학기나 유학 같은 것은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더더욱 실감이 나지 않는 전화를 받은 것은 지루함이 극에 달한 쉬는 시간이었다. 처음 연결된 출판사였다. 잘 모르는 일본, 르포르타주 작가의 사회과학서적의 추천사를 받고 싶다고 했다. 뭔가 심드렁한 상태로 듣다가 책 제목을 물어보았다.

“네, 작가님. 책 제목은 <여성 파산>이고요.”
“여성… 파산이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무려 1인 가구 여성이 빈곤에 빠져 파산하는 문제를 다룬 내용인데, 제가 추천사를 쓴다면 딱 맞을 것 같았다고요? 알바와 무소속 인생에 관한 에세이로 첫 책을 내서인가요? 나는 물음표가 가득한 채로 승낙했다. 무엇보다 책의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1인 가구 여성 3명 중 1명이 빈곤층’이라는 일본의 통계로 시작하는 책은, 훌륭했다. 왜 여성은 계속 일하면서도 가난해지는지, 왜 여성의 가난은 숨겨지고 있는지,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1인 가구의 여성에게 돌봄 노동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부담시키는지, 저자는 꼼꼼하게 사례를 들어 기록하고 있었다.

중간에 참지 못하고 맥주를 마셔야만 했던 나는 뜨거운 얼굴, 차가운 머리로 추천사의 첫 부분을 써 내려갔다. “30대, 여성, 비혼, 소속 없음. 내 삶을 정의하는 몇몇 단어들과 바로 등을 맞대고, 가난과 빈곤 같은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결혼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혼자 살아가기로 한 비혼 여성인 나의 미래는 아주 높은 확률로 폐지 줍는 할머니가 되거나 이태원에서 깔끔하게 차려입고 영어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만 결국 미쳐버리고만 노숙자인 맥도날드 할머니가 되리라는 걸, 모른 척 해왔다는 자기 고백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아 책이 도착했다. 그사이에 난 영어 성적과는 상관없이 유학은 우선 1년 뒤, 실제로는 오지 않을 미래로 미룰 것을 결정한 상태였다. 여성 1인 가구의 56.9%가 월평균 소득 100만 원 미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통계를 인용한 기사가 눈과 마음에 걸려 자칫하면 넘어질 것 같던 날들이었다. 도착한 책의 뒷면에 실린 추천사는 단 하나. 윤이나, <미쓰윤의 알바일지> 저자, 그러니까 내가 쓴 글뿐이었다. 정말이지 여성 파산의 대표주자로 임명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우리의 가난은 더 이상 모른 척해야 할 것도, 죄송한 것도 아니어야 한다”로 끝나는 추천사를 다시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절대, 어떻게든 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 여성의 삶이라면,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뭐라도 되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심지어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대체로 가난하게 나이 들어갈 뿐이다. 그러니 파산을 향해가는 비혼 여성의 대표주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어울리지 않게 명랑한 노랑의 책을 그저 꽉 쥐어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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