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하기 좋은 날 1. 유니콘은 없다

생각하다독립결혼과 비혼

비혼하기 좋은 날 1. 유니콘은 없다

윤이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스스로를 비혼이라고 지칭한 것은 비혼이라는 단어를 안 직후부터다. 비혼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접하고, Miss 와 Mrs 의 세상에서 Ms 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성인이 되고나서였다. 이전까지는 미혼과 기혼, 결혼이라는 기준에 따른 두가지 기준만 존재하는 세상에 살았다. 이런 사회에서는 결혼은 당연히 언젠가는 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기 쉽다.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결혼이 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가족이 늘어난다는 점이 그랬다. 결혼으로 얻게 되는 동반자야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느 정도의 애정과 의무로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 관계는 적으면 적을 수록 좋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책임이 따르는 인간관계의 확장을 기꺼이 선택하는걸까? 지금은 이런 선택에 사회와 개인의 복잡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혼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미혼이 언젠가의 결혼 이전의 상태라면, 비혼은 삶에서 결혼을 뺀 상태다. 그냥 원래부터 결혼이 없는 것이다. 현재를 결혼으로 인해 유예시킬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비혼의 삶은 미혼의 삶과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미혼과 비혼

하지만 결혼이라는 인생의 과제 완수를 해내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나의 부모님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미혼과 비혼을 구분하지 못하고 구분할 생각도 없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다들 “콩깍지가 씌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저러다가 콩깍지 씌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후다닥 결혼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하는 것이다. 사회생활 10년 차가 넘어가는 서른도 훌쩍 넘은 여성의 판단을 일단 부정부터 하는 태도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그렇게까지 콩을 좋아하는 것인지 이해 할수가 없다. 안경도 선글라스도 아닌 콩깍지를 눈에 왜 쓴단 말인가? 유치한 비유라고 생각한다면, 정확하다. 지금 아주 많은 사람들이 비혼에 대해 정확하게 이 수준의 비유를 들고 있다. 그것이 감정이든 조건이든 한 순간 무엇인가에 눈이 멀어버린 상황이라면 앞으로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중요한 선택은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옳은 일 아닌가? 왜 이성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후다닥 내려버린 결정에 인생을 걸라고 말하는 것일까?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라면 유난스럽고 적극적인 참견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나의 대처법은 일단 ‘내가 알아서 할게’, ‘언젠가 할 때되면 하든가 말든가 하겠죠’라는 심드렁하고 유보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대충 저 정도면 기혼자스플레인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이 나 자신에게도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굳이 비혼인 것을 소리내어 말하고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주입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읽고있던 책에서 이 구절을 마주한 뒤였다.

여성이 비혼 1인 가구로 사는 것을 하나의 합리적인 ‘선택’으로 둘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함께’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불안이 내모는 고독한 사리에서 만나는 것은 결혼이 ‘언젠가’ ‘나에게는’ ‘예외적으로’ ‘(지금 불안을 해결할) 안정에의 도약’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난수(random number)의 환상이었다.

-안은별, <IMF 키즈의 생애>

정말 얼음물이라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일단 싫은 소리를 안 듣겠다는 이유로 대충 결혼을 ‘언젠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사건으로 미뤄두고 ‘정말 기적처럼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혹시 모르지’ 같은 말들을 하면서, 나 역시도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복권 당첨을 기대하듯, 내 주변 누구에게도 찾아오지 않았으나 나에게만은 개인적인 불안을 한 큐에 치유할 그런 기회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는 환상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래에 ‘혹시’라는 부사를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러할리는 없지만 만일에’라는 뜻이라니, 그러할리 없다면 그냥 그러할리 없는 것이다. 환상이 현실이 될 일도, 내눈 앞에 유니콘이 나타날 리도 없다. 비혼이라고 말을 하면서 여지를 남겨두는 일 따위는 해서는 안된다. 그거야말로, 나 편하고 싫은 소리 듣기 싫다고 비혼이 불완전한 상태일 수 있다는 여지를 상대에게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딸이 언젠가는 남 부럽지 않은 결혼을 하리라는 기대’를 여전히 품고 있는 부모님께, 정확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콩깍지도, 로또도 없다고. 당신들의 딸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어쩌면 이 결심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선택이 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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