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네가 올해 몇 살이지?’라고 묻는 친척 어른들이 이해가 안됐다. 사람의 나이를 외우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그때는 변하는 숫자로써의 나이를 외우는 일은 삶에서 기억해 둬야 할 수많은 숫자와, 이를테면 주소와, 휴대폰 번호와, 가지각색의 비밀번호와 기타 등등의 사이에서 후순위로 밀려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 나이도 종종 헷갈리는데, 남의 나이, 그것도 5촌 조카라든가 지인의 아이의 나이까지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말이다. 외국에서 사용하는 만 나이와 뒤죽박죽 되어버린 요 몇년은 정말로 내 나이에 대한 감각도 흐려져서 누가 나이를 물으면 바로 안 나오는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출생년도로 대답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이는 굳이 서로 안 묻는다면 정말 좋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돼지 띠인가?
사정상 오랜만에 나이와 출신지역 등을 묻는 사람들과 반복해서 자기소개를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는데, 나의 출생년도 대답에 대한 이런 리액션은 처음이었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그 해(亥)입니다, 라고 답하면 안 될 분위기라 ‘네, 뭐’ 하고 말았다.
돼지띠면 결혼은 했겠구만.
띠에 이어 나이만으로 결혼 유무를 확정하다니, 이런 식의 화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꽤 오랫동안 한국식 오지랖 질문에 노출되지 않은 삶을 살아왔구나. 좋은 시절이었다’라는 생각이 드는 한 편, 어쩐지 질문에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뭐지?
기시감
그러고보니 비슷한 질문을 몇 달 전에 받았었다. 데이팅 앱으로 매칭 된 미국인과 채팅을 하고 있는데 멀쩡한 대화가 오가던 중에 갑자기 ‘너는 결혼 안했어?’라고 묻는 것이다. ‘결혼을 했으면, 이걸 하고 있을까?’ 사실 속으로는 할 수도 있지 뭐,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하튼. 그 다음에는 바로 이런 말이 따라왔다.
아니, 네 나이 정도의 한국 여자는 다 결혼을 했더라고.
나는 매칭 취소를 누르며 생각했다. 네 나이 대 미국 남자는 다 미국에 있던데, 너는 왜 한국에 있니?
나이와 국적, 인종과 상관없지만 성별과는 상관있는 오지랖을 몇 차례 지나며 나는 결혼과 관련된 질문에는 결국 답하지 않는 게 가장 효과적인 의사표현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학생에게는 공부를 잘하는지 묻고, 성인이 되면 취업의 유무와 연애의 유무를 묻고, 사회가 정한 결혼 적령기의 사람에게는 결혼 여부를 묻는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를, 계획을 묻는다. 결혼을 했다면 아이에 대해서, 또 그 다음 아이에 대해서 묻는다. 그리고 그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지를 묻는다. 이 낡아버린 생애주기에 따른 패턴화된 질문들을 끊어버릴 수 있는 방법은 침묵이라는 대답은 아닐까? 이전에는 두 번 볼 사람이 아니거나, 멀고 먼 친척 지인 정도라면 ‘네, 뭐 그렇게 됐네요’ 같은 두루뭉술한 답으로 대충 상황을 무마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저런 질문의 연쇄를 아예 끊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요새 젊은 사람들한테는 무슨 말도 못하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못하는 상황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다시, ‘결혼은 했겠구만’으로 돌아왔다. 일단은 대답을 하고, 다음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아뇨. 저는 비혼이라서요.
이제는 비혼이 뭔지 묻지 않을까. 그렇다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시라고 할까. 나이를 듣고 결혼 유무를 판단하는 일과, 모르는 단어를 검색 하라고 하는 일 중에 무엇이 더 무례할까. 무례한 사람한테 웃으면서 화내는 건 괜찮다고 하던데, 웃으면서 ‘아유, 선생님. 모르는 단어는 검색하시면 되잖아요’하면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예상치 않은 답이 돌아왔다.
나이가 좀 있긴 해도, 미혼이 뭐 흉인가.
세상에, 아예 비혼이 뭔지를 모를 것이라고는, 멋대로 비읍을 미음으로 들어버리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 말에는 ‘네, 뭐.’라고도 답하지 않았다. 나와 장년의 남성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선택한 침묵이라, 불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