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하기 좋은 날 4. 어느 날 가계부가 물었다

생각하다독립결혼과 비혼

비혼하기 좋은 날 4. 어느 날 가계부가 물었다

윤이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경고! 하루 카페인 권장량을 아득히 넘어섰어요!

경고라니, 무슨 기상특보라도 뜬 줄 알았다. 경고라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듯 빨간색으로 표시된 메시지를 누르자, ‘비싼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어요’라는 문구 위로 테이크 아웃 커피 컵이 쪼르륵 늘어서 있었다. 오늘 커피를 두 잔 마셨고 프랜차이즈 카페 전용 카드를 충전했으며, 지인에게 커피 기프티콘을 보냈다는 이미 알고 있는 소비의 나열 끝에 가계부가 해 준 조언은 이것이었다. 

포기할 수 없다면, 할인이라도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돈을 좀 체계적으로 관리해보자는 결심과 함께 5년 동안 손수 입력하던 가계부 대신 계좌, 신용카드와 자동 연동이 되는 가계부 앱을 사용하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지금까지 가계부 입력이 내게 남은 돈이 얼마나 있는가 정도를 확인하는 수준이었다면, 통장 잔액을 눈앞에 끊임없이 들이미는 가계부와 함께하는 날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새로웠다. 한 달 지출 예산을 짜두면 일주일 단위로 알림을 보내주는데, 덕분에 ‘이대로라면 예산 초과입니다’라는 경고 알람에 깨어나 아침잠을 설치기도 했다. 이번 달 남은 날들 동안 매일 얼마를 써야 예산을 맞출 수 있는지를 확인한 뒤, 당연히 못 맞출 것을 일찌감치 예감하면서도 좀 덜 써볼까 생각하는 날들도 늘어갔다.

시작이 중요한 이야기

어쩌면 이미 다들 충실하게 가계부를 정리하고 통장을 너댓개 씩 만들어 체계적인 돈 관리를 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야 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느끼고, 궁금해하는 건 나만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때면 뭔가 한참 늦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번만은 시작이 중요하다고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돈을 관리해보겠다는 건, 결국 회피하지 않고 지금 여기 살기에 직면하겠다는 의미일테니까. 그리고 이전의 나처럼, 1인분의 삶을 책임져야 하고 책임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당장 먹고 입고 자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군가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비혼이 혼자 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한자 그대로의 의미로 ‘홀로 서는’ 독립과 의미가 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로 기대어 함께 갈 수도 있지만, 기댈 사람도 제도도 없을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독립이다. 타인과 함께하는 상황이 아닐 때도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혼을 선언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을 이유는 없다. 비혼은 완전한 혼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아니다. 비혼을 결심했다 해도 타인을 생활의 동반자로, 먼 길을 함께 가는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전통적 가족의 일부와 함께 살 수도 있다. 독립이 반드시 자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비혼도 혼자 살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 울타리 만들기

비혼을 선택한 우리에게 독립의 의미는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생존을 넘어 생활다운 생활을 하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울타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적 가족이라는 사회가 강요하는 형태의 울타리를 원하지 않고 그 안이 안전하거나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울타리를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나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걸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돈이었다. 그러니 이제야 이런 나를 가계부가 좀 혼내고, 경고를 보낸다 한들 ‘겨우 가계부 주제에’라며 화를 내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 와중에도 내가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좀 우스웠을 뿐이다.

나는 이제 푼돈 모아 푼돈이라거나, 한 번뿐인 인생을 흥청망청 즐겨보자는 말은 믿지 않는다. 잠깐의 소비로 얻는 즐거움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자주 누려온 대신, 마치 나이 들지 않고 영원히 일하며 돈을 벌 수 있을 것처럼 살아왔다. 걸려 넘어질 문턱 하나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사고나 불운도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이 아니라, 내일도 괜찮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싶어졌다. 이제 포기할 수 없는 건, 정말 커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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