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이 무섭고 다가가기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단호한 말투 때문인가 싶어서 한동안 일부러 끝을 흐리는 연습도 했어요. 어리고 여자인 사람이 이런 말투를 가진 걸 다들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추운 날 칼바람을 뚫고 신촌의 브런치 카페에서 고래를 만났다. 고래는 질문마다 빠르게 답을 떠올려 또박또박 쉴 틈 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청산유수의 기세와 달리 말끝마다 ‘뭔지 알죠?’ 하며 동의를 구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입시 때문에 자기소개서를 많이 써서 지긋지긋하다는 고래에게 결국 소개는 듣지 못했다. 인생을 간략하게 브리핑해달라는 말에도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로스쿨 면접보다 어렵네요. 인생이 브리핑이 되나요? 저희 혹시 밤새도록 인터뷰하나요?
Q. 그럼 고래는 뭘 좋아하세요?
A. 마시는 걸 좋아해요. 물, 술, 커피, 차 등 액체로 된 것을 마시는 거. 그래서 고래에요.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다이어리도 좋아하고. 예쁜 다이어리를 보면 내 것으로 만들어서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겨요. ‘내가 쓰면 저거 진짜 잘 쓸 텐데!’ 하면서. 원래는 제가 날짜가 없는 만년 다이어리만 썼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날짜가 있는 걸 쓰고 있어요. 이것도 쓰다 보니까 또 괜찮아요.
Q. 날짜가 없는 걸 썼던 이유가 있나요?
A. 제가 보통 6개월이나 빠르면 3개월이면 다 쓰는데, 일 년 기준으로 날짜가 있으면 안 맞아서 불편해요. 새 다이어리를 사고 싶어지면 있는 걸 얼른 다 써버리려고 더 빨리 쓰거든요. 그냥 새로 사도 되지만, 중간에 다른 걸 사서 쓰면 쓰던 건 실패한 다이어리가 되잖아요. 그럼 버리고 싶어져요. 사실 실패한 걸 버리는 건 제 성격 중에서 좀 못난 점이라고 생각해요.
Q. 좀 봐도 될까요? 색깔 별로 플래그가 많이 붙어있네요.
A. 네, 플래그 위에 할 일을 써서 붙여두고, 미룰 땐 다음 날짜에 그대로 떼어서 붙여요. 직접 종이 위에 할 일을 썼다 지우는 수고도 줄일 수 있고, 더 깔끔하게 꾸밀 수도 있어요. 물론 조금 더 쉽게 일을 미루기 위해서는 아니고요, 하하.
고래는 포스트잇 플래그 외에 스티커도 활용하고 그림도 그려 다이어리를 꾸미고, 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크로노덱스 스탬프도 사용한다. 간단한 휴대용 다이어리도 있고, 위클리, 데일리 다이어리를 각각 한 권씩 총 세 권을 쓰고 있다. 일정을 예쁘게 정리하고 매일 일기를 꾸준히 쓰며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간다. 그런 알찬 하루도 좋지만 바쁘고 숨 막히지는 않은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제가 자꾸 시간이 많다고 착각하고 저 자신을 과신해요. 일을 5시간밖에 안 하니까, 만약 공부를 4시간 하면 총 9시간밖에 안 썼으니까, 다른 시간에 뭔가 더 할 수 있을 것 같고. 사실 이번 달 목표가 하루에 할 일을 조금씩만 정해서 다 하고 만족스럽게 잠드는 거예요. 요새 통 그러지 못했거든요.
Q.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준 적이 있나요? 어떻게 설명할지 망설이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사람도 있잖아요. 어제 소설에서 본 건데 저는 그렇거든요. 고래는 왠지 안 그럴 것 같아요.
A. 네, 저는 그런 거 바로바로 잘 가르쳐줘요, 하하. 알면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답을 줘요. 곤경을 빨리 해결해주고 싶어서 막 마음이 급해지더라고요. 모르면 찾아서 알려주거나, 빨리 모른다고 얘기하고요.
Q. 인생 전반에서도 빨리빨리 잘 대처하거나 행동하나요?
A.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망설이기는 하죠. 근데 요새 중요한 결정은 의외로 충동적으로 했네요. 학교를 관둬야겠다, 뭐 그런 거요. 제가 지난 학기에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갑자기 휴학했거든요.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요. 돈은 벌면 되고, 나는 아직 어리고, 인생은 쉽게 망하지 않는다! 요새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거꾸로 말하면, 그거 세 가지가 제일 걱정됐나 봐요.
Q. 왜 로스쿨에 가게 되었어요? 법 공부가 적성에 맞았나요?
A. 할 줄 알고 잘 하는 게 공부밖에 없었어요. 근데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또 모르겠어요. 학부 때는 밤새도록 공부해도 체력이 좋아서 멀쩡했는데, 요새는 하루하루 힘들어요. 공부라는 게 하려면 한없이 할 수 있잖아요. 범위가 아무리 정해져 있어도 더 깊이 더 자세히 하려면 끝도 없고. 상대평가라 다 같이 끝도 없이 하니까 점점 힘들죠.
Q. 고래가 못 하는 것은 뭔가요?
A. 갑자기 해야 하는 일 처리를 못 해요. 예를 들어 휴대폰 액정이 깨지거나 하면 갑자기 서비스센터에 가서 고쳐야 하잖아요, 그런 거? 일정이나 동선이 정해져 있는데 그걸 끼워 넣으면 다 어긋나고 너무 막막해서 왜 휴대폰 액정을 깨 먹었나 스스로 화도 나고 울고 싶고 그래요. 그리고 비난을 듣는 걸 잘 못 해요. 누구나 못 하겠지만요. 살면서 싫은 소리를 들을 기회도 많이 없었고. 웬만하면 어디 가서 죄송할 일을 잘 안 만들려고 노력해요.
Q. 그래도 비난을 받을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땐 어떡해요?
A. 그런 상황이 되면 죄송하다고 해야죠. 좀 다른 얘긴데 저는 남한테 죄송하다고는 해도 잘못했다고는 안 해요. 죄송하다는 건 상대가 정해둔 기준을 어겨서 미안하다는 건데, 내 기준에서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니까요. 고등학교 때 교복 안에 흰 티셔츠 입지 말라고 하면, 이해가 안 되잖아요. 춥고 비치니까 입는 건데. 그럼 죄송하다고는 하지만, 내가 잘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잘못했다고는 안 해요.
Q. 살면서 ‘~답지 않다’고 느꼈던 적이 있나요? 없으면 없다고 대답해주세요.
A. 어려워요. 빈칸을 채워서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Q. 음, 그럼 혹시 청년답지 않다고 느낀 적 있어요?
A. 아, 저는 너무 청년다운데. 신자유주의 시대의 불안한 청년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저는 ‘신자유주의적 인간’답지 않네요. 딱 쓸모 있는 일만 하지 못하고, 자꾸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말할지도 모르는 일들에 마음이 쓰여요. 품이 드는 것에 비해 성과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일들. 학교 강의실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 지나칠 수 없고, 자꾸 관심을 기울이게 돼요. 바쁘고 시간이 없어도 젠더 소모임을 없어지게 놔두느니 일을 맡게 되고요.
Q. 고래는 어쩌면 엘리트 ‘알파걸’에 동일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여성주의에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여성주의가 삶과 맞닿게 느껴진 고래만의 맥락이 있나요?
A. 대학 선배들이 좋은 페미니즘 책을 권해줘서 읽었고, 다 맞는 말이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 중에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특히 제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엄마가 일해서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걸 보며 자라서, 가부장제에서 남자가 생계를 부양하면 거기 의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 안 들었거든요. 스스로 살길을 찾고 내 몸은 내가 건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가장의 체면과 지위는 또 있고, 그게 뭔가 안 맞잖아요. 그런 게 마음에 걸릴 때가 있었는데 페미니즘을 알고 나니 의문이 해소되고 딱딱 맞아 떨어지더라고요.
Q. 서울에서 여성 청년으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A. 무엇보다 집을 구하기가 한층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은 대학생 전세임대주택에 살고 있는데, 곧 계약이 끝나서 나가야 해요. 기숙사는 50만 원도 넘어서 자취하는 게 낫거든요. 근데 여자 혼자 살려면 위험하니까 1층이나 반지하를 피해야 하고, 골목길이나 외진 곳도 피하고 싶은데 그런 곳은 더 비싸죠. 여성이고 청년이고 아무튼 여러 이유로 벌이는 또 많지 않죠. 저는 그래도 최소 6평은 됐으면 좋겠는데. 아, 집을 구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고래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옷을 가볍게 입고 어디든 걷고 싶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오면 만화책도 드라마도 보고 끝없이 오래 자고 싶다. 그렇지만 다음 주부터는 중국어 학원도 다니기로 해서, 좀 더 바빠질 예정이다. 고래는 바쁜 나날들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한다. 이렇게 활기차고 진지하게 삶을 대하는 고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살면서 놓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엄마예요. 엄마를 위해서 살겠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삶의 여러 결정을 내리고 그럴 때 엄마를 고려한 결정을 내리려고 해요. 엄마는 내가 뭘 하든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줬고, 지금도 그래요. 저한텐 늘 위로가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