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힙스터들에 둘러싸여 이 글을 마저 쓰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럽으로 도주한 것이었다면 굉장한 드라마가 될 테지만 드라마는 넷플릭스에서 <길모어 걸스>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므로 단지 일주일간의 출장을 떠나왔을 뿐인 점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맡기고 온 고양이들이 그립다.
이 글을 <그것이 알고싶다>처럼 쓰고 싶지는 않았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소개가 사회고발풍의 에세이가 되어버리는 어린 시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폭력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9살 때인데, 분명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나를 때렸고 어머니는 방관하면서 때로는 매를 거들었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는 나를 주로 정서적으로 학대했고 아버지는 이에 물리적으로 동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어디서든 이런 고백을 듣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매우 비극적이고도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트위터에서 어떤 가정폭력 현장의 중계-중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용서하시길-를 최근에 볼 수 있었다. 평소에도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일상적으로 위협받아오던 그녀는, 급기야 그날은 위험한 물건으로 어머니와 자신을 공격하기에 이른 아버지를 막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알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안타까워하며 그녀에게 여러 정보를 전하고, 고양이를 돌봐 주겠다고 나섰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는 많은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하며 자신이 앞으로 더욱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무처럼 여긴다고, 가정 폭력의 피해자가 모두 불행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을 본인의 사명처럼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사명감은 깊이 존경할 만한 종류의 것이다. 나는 그녀를 돕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서로 돕는 순간을 보고 희망과 위로를 느꼈다.
우리 가정폭력 생존자들은
학대의 기억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다양하게 불행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무엇을 경험했느냐와 관련 없이 현재의 내 삶은 여러가지 이유로 비극적이다. 이 공간을 빌어 이 비극을 가능한 실용적인 방향으로 공유하는 것이 이를테면 나만의 사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 하드웨어에 탑재되어 있는 주눅 든 9살짜리 아이(안타깝게도 이 운영체제를 삭제 후 재설치하여 하드웨어를 공장초기화 상태로 만드는 것은 현재의 정신 의학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를 돌보는 방법은 이 아이에게 매달 충분한 용돈을 주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정 폭력 피해자들의 다양한 삶들을 비교해볼 때 기성 세대로부터 자산을 증여받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규직 직장이다. 나의 직장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도왔다. 부모가 언제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수 없는 자기만의 방을 얻을 수 있는 것, 정신과 상담비를 지불할 수 있는 것, 결혼이 계획에 없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내 계좌에 다달이 입금되는 급여와 해당 신용에 근거하여 돈을 빌려주는 은행, 그리고 카드 회사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건강한 신용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건강한 육체 따위야 신용카드로 PT와 병원비를 결제해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생존자 여러분,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나가서 돈을 벌어라.
방법은 많다. 부모의 호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본인의 실존에 위협이 되는 모든 자녀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나의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이 벌면 더 좋다. 그리고 물은 축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