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도 유명한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이자 전세계인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발레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발레 공연도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였다. 발레리나-발레리노 두 사람의 파 드 되(pas de deux, 2인무)를 3층에서 맨눈으로 내려다보는데, 발레리나를 땅에 매어놓고 있던 중력이 사라지니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이다보니 2차 창작의 소재가 될 기회도 많다. 나라 밖 사례로는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영화 <블랙 스완>이 있고, 국내 사례로는 그룹 신화가 이 작품 2막의 주제음을 빌려 <T.O.P.>라는 곡을 내놓은 바 있다.
<블랙 스완>이나 신화의 인기곡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0여년 전에 나우컴퍼니라는 기획사가 <미친 사랑, 백조의 호수>라는 제목의 창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린 적도 있다. 이 뮤지컬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를 원작으로 하되, 극의 배경을 집창촌으로 한다. 당시 이 작품을 둘러싼 평가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로써는 연출가 이은성의 이러한 원작 해석이 특별히 파격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발레 <백조의 호수>를 거듭해서 본 성인이라면 누구나 닿을 수 있는 어떤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백조들은 무엇의 상징인가?" 그리고 "마법사는 왜 여자들을 백조로 만들었는가?"
(이럴 수도 있다)
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발레 <백조의 호수>. 원래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나온(성구매에 나섰다고 할 수도 있다) 지그프리트 왕자가 우연히 백조 오데트(성판매 여성일 수도 있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아시겠지만 금지된 행위다). 마법사 로트바르트(포주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지그프리트에게 자신의 소유인 백조를 빼앗긴다고 생각한 나머지 둘을 떼어놓기 위해 자신의 딸인 오딜(또 다른 성판매 여성일 수 있다)을 시켜 지그프리트를 유혹하게 한다. 지그프리트는 어리석게도(대체로 이런 지점에서 남자들은 어리석음을 연기한다) 오데트와 오딜을 구분하지 못하고, 오데트는 절망에 차 죽고 만다. 컴퍼니마다 결말은 조금씩 달라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공연도 있다. 당시 러시아 현지에서는 정치 상황에 따라 오데트가 죽고-아니고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위와 같은 스토리를 재해석해보면,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로트바르트가 사실 포주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상식적인 해석인 것 같다. 성매매를 중개할 생각이 없다면 뭣하러 애먼 여자 수십 명에게 저주를 걸어 백조로 만든 뒤 왕족들이 사냥을 오는 숲속 호수에 띄워 전시하겠는가. 이은성의 연출에서 심지어 지그프리트는 동네 양아치로 나왔다. 현실의 백조들에게 주어진 남자는 왕자조차 아닌 것이다.
하기사 현대의 관객들이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클래식 작품들 대부분은 혐의를 벗기가 어렵다. 차이코프스키의 생전에는 성구매(심지어 아동 성구매까지도)가 오늘날과 같은 중범죄가 아니었다고 한다. 음악이나 무용 등으로 이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당시 남자 예술가들의 역할이었던 것인가보다.
'엑기스'
반면 당시 여성 예술가들의 역할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난 회(2. 드가의 아저씨들)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당시의 발레 공연장 무대의 양끝 날개(wing)는 성구매 남성들의 사냥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 스완>이 개봉했던 2010년 당시의 사정은 드가 생전의 시기보다 더 나았던가? 별로 그렇지도 않다. 영화 속 발레단의 남자 감독은 위계를 이용하고 캐스팅을 빙자해 발레리나들을 강간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며, 영화 밖의 남자들은 여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맺기를 성적 대상화 없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나머지 <블랙 스완>의 특정 부분을 '엑기스'로 소비하고 있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이런 세상에 여자로 살면서 아직도 발레를 착즙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새로 태어났으면 하늘이라도 날아보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