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시지프스의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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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게임: 시지프스의 바위

진영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지난 봄 어머니와 간간이 전화 통화와 문자메세지를 주고받아오다 날이 더워질 즈음부터 일절 연락을 받지 않았더니 곧이어 협박장이 도착했다. 자꾸 그렇게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지난 번처럼 회사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가겠다는 거였다. 나 때문에 잠을 잘 수 없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걸렸다며, 나만 마음을 고쳐 먹으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완벽해진다는 메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패턴

이제는 내 부모의 패턴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무릎을 꿇을 기세로 모든 것이 다 자신들의 잘못이라며 사죄하고 애걸하다가, 내가 조금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으면 하나씩 요구 사항을 말해온다. 식사를 하자거나, 가족 여행을 가자거나… 마치 그런 이벤트를 통해 모든 게 마법처럼 변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 같다. 동그란 사기 접시에 형광연두색 덕용 드레싱이 뿌려진 양상추 조각을 내놓는 한식당 같은 데 다같이 둘러앉아 눈가가 짓무른 부모가 누구 딸이 시집을 갔고 애를 낳았고 어쨌다는 이야기를 하며 내 눈치를 보는 걸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듣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이 가족의 결함이 마법처럼 치유된단 말인가?

나는 계속해서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며 거절한다. 그래도 부모의 요구는 지칠 줄 모르고, 특히 명절이 다가오면 심해진다. 이때 내가 일체의 연락을 거부하면 적반하장이 되어 화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 가족은 완벽한데, 너만 입을 다물고 고분고분 숙이고 들어오면 남부끄러울 일이 없는데, 네가 마음을 고쳐 먹으면 늙은 부모의 병이 단번에 나을 텐데, 이건 전부 너 때문이라는 요지의 메세지가 온다. 집이나 회사로 찾아오겠다는 협박도 빠지지 않는다. 이 상태에 이르면 나는 늘 쓰던 카드를 꺼낸다. 별로 특별한 기술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나열할 뿐이다. 심리학 ‘썰’에 자주 등장하는 ‘마음 속의 어린 아이’를 불러내는 것이다.

마음 속의 어린 아이

그 아이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열 살짜리 아이 다리를 피멍이 들도록 때려 한여름에도 스타킹을 신게 했던 일, 학교 가는 아이 얼굴을 커다란 빗으로 후려쳐 등굣길 내내 빗 모양 멍을 둘러댈 핑계를 꾸며야 했던 일, 크림 통을 집어던져 손가락이 부러진 아이에게 보험카드와 지폐 몇 장을 주면서 병원에 갔다 오라고 한 일, 서랍을 뽑아서 내용물을 내 몸 위로 털어내고는 이어서 그걸로 등짝을 쿵 하고 내리쳤던 일, 책상 앞에 앉은 아이 머리채를 휘어잡아 방바닥으로 패대기친 일 등을 먼저 말한다. 이어서 내가 들은 욕설과 저주도 말한다. O같은 O, OOO, 자식이니 망정이지 남이었으면 상종도 안 했을 O, 밥은 뭐하러 먹는지 알 수 없는 O… 여기 쓰는 것과는 달리 숨김표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써서 보낸다. 당신들은 나에게 이런 행동을 했고 저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고 25년을 살아온 사람이 부모를 만나고 싶을까요?

그러면 곧장 답장이 온다. 

아직까지도 부모를 탓하고 원망하느냐, 그게 전부 너 잘 되라고 한 일이 아니냐, 사춘기 접어들어 네가 얼마나 말썽을 피우고 공부를 안 했냐, 집안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느냐, 잊어라, 용서해라, 왜 지나간 일을 헤집어서 부모에게 상처를 주느냐고 한다.

그러면 나는, 당신들은 누군가에게 저런 대접을 받은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오히려 당신들이야말로 어떻게 나를 저런 식으로 괴롭힌 사실을 다 잊었느냐고, 사춘기는 커녕 아홉 살 열 살때부터 나는 피멍을 달고 살았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비행을 저질렀길래 나를 저렇게 대우했느냐고, 저것을 어떻게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냐고. 특히 어머니가 매번 그 빌어먹을 '집안 사정' 이야기를 꺼낼 때면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억눌러 평정을 되찾아야 할 지경으로 흥분하게 된다. 말씀대로 우리 집안 사정이 참 어려워서 나는 대학 졸업반 때 학비를 벌려고 학교를 다니면서 학원 일을 두 개나 했는데, 놀랍게도 남동생은 내가 일하던 학원에 회비를 내고 다녔지 않냐고, 한 가지 사정 아래 저 두 가지 일이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느냐고 되묻는다. 내가 취업 준비하며 독서실 자리를 잡겠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자 당신들 잠 깨웠다고 온갖 짜증을 내고 면박을 줘놓고, 그 해 기어코 취업에 성공하자 ‘코앞에 닥쳐서야 조금 공부하는 흉내 내더니!’ 하면서 내 노력을 면전에서 비웃은 것을 기억하냐고, 그 때 내 나이가 스물 넷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록 내가 당신 같은 부모 아래 그런 대접 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살아서 그 지옥에서 빠져나왔고, 혹시 당신들이 정상인데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하여 병원에도 열심히 다녔다고, 나는 그 누구보다 강하니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물렁하게 넘어가지 않는다고, 괴롭히지 말라고 말한다.

역시 곧장 답장이 온다. 자기가 죽으면 되겠느냐고 할 차례다. 빙고! 어머니는 지금 당장 자신이 죽으면 용서해 주겠느냐고 한다. 전에는 이런 식의 협박을 들으면 심장이 멎는 것 같고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어 끝내 힘을 풀어버리곤 했지만 지금의 나는 어지간한 인간이 덤벼서는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나도 곧바로 답장한다. 콱 죽어버리겠다, 같이 뛰어내려 죽자, 너 죽고 나 죽자, 이렇게 공부 못 하는데 뭐 먹고 살 거냐 어차피 굶어 죽을 거니 그냥 지금 죽자, 물 뚝뚝 떨어지는 식칼을 내 책상 위에 턱 갖다 올려놓으며 하던 말들 전부 기억하고, 하도 자주 들어 이제는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자살 협박 하지 마세요, 안 통하니까, 라고.

꼭대기

여기가 거의 정상, 꼭대기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를 여기까지 끌고 가면 어머니는 갑자기 속죄하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이 된다. 자신은 내가 준 이 모든 상처를 딛고 일어나 다시 살아갈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기 남편과 자기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은 꿋꿋하게 지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보낸 문자 메세지를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니 지워 버릴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한번 했던 얘기를 석 달쯤 지나 똑같이 다시 해야 한다.

어머니는 저렇게 정상에 올랐을 때, 그래서 탈진할 지경이 되었을 때에 이르러서야 가끔 진심을 말한다. 지금 자기 곁에 있는 가족들은 무능해서 사람 구실 못 하니 꼴 보기 싫고 밉고, 대신 멀리 있는 네가 보고 싶다고. 현재 어머니 등에 매달려 피를 빨고 있는 두 남자를 떠올려 본다. 자기보다 약한 유일한 인간이 나라서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아버지는 스탠딩 코미디언 혹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큰 돈을 벌겠다는 포부를 가진 나머지 생활비 버는 것을 잊어버리는 노인이 되었고, 늘 어려웠던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고액 과외를 받고 나이키 운동화를 꼬박꼬박 얻어 신던 남동생은 대입 직후 게임 중독에 빠져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고 올해 서른 한 살인데 이때까지 천원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으며 몇 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다들 이 모양이니 어지간했으면 나라도 나서 어머니를 구원하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하건데, 내 어머니는 절대로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다. 믿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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