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플래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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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게임: 플래시백

진영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2016년, 한 해 마무리를 앞둔 어느 날 일이다.

퇴근해서 집 앞에 도착해 보니 현관 앞에 또 그게 놓여 있었다. 

군데군데 벌건 얼룩이 묻은 하얀 스티로폼 박스다. 내 삶이 스릴러 영화라면 이 스티로폼 박스 안에는 전체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 것의 일부가 들어있겠지. 하지만 내 인생에는 공포 요소가 덜하고 짜증 요소가 많다. 박스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다리에 힘을 줘 들어올린 다음 아슬아슬한 포즈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월세살이이기는 하나 내 집, 나 말고 아무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 스티로폼 상자의 존재만 이물질 같다. 사실 이건 그냥 어머니가 보내온 김장 김치다.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의 해롤드 핀치 씨는 "강박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핀치 씨를 쫓은 것이 CIA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였더라면 그조차 뒷걸음질쳤을 것이다. 해로운 가족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나는 이사를 하고, 직장을 옮기고, 전화번호를 바꾸었고, 낯선 인상의 중년 남성이 보이면 심부름센터 직원일까봐 경계했고, 부모와 말을 트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었다(심지어 대학 동창들과도.) 하지만 어머니는 매번 나를 찾아왔다. 그러느라 개인정보보호법도 위반하고, 많은 공무원들과 콜센터의 직원들로 하여금 자신과 더불어 법률을 위반하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럼에도 언제나 당당했다. 한국 땅에서는 가족증명서 한 장이면 못 떼볼 서류가 없다고 했다.

찝찝한 방법으로 내 주소를 알아낸 어머니는 아무 날이나 골라 무작정 상경해 집 앞에 앉아 있는 방식을 택했다. 내 퇴근을 기다리며 집 앞 가게를 돌아다니며 내 신상을 캐는 것은 기본이다. 부동산에 들어가 저 집 월세가 얼마냐 묻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했음을 나에게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은 딸을 사랑하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정말로 '무엇이든'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고, '뭘 해도 비난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의미이다. 즉, 한국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나 역시 그간 꽤나 맷집을 키워놨다. 

호락호락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늙어 힘없는 부모 역할에 심취해 울며 호소하는 정도로 무너질 내가 아니다. 하룻밤만 자고 가겠다, 조금만 이야기를 하다 가겠다던 어머니는 내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자 결국 바리바리 싸온 각종 사소한 것들을 도로 담아들고 후퇴해야 했다. 어머니는 쫓겨나며 나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또 찾아오겠다고 했다. 이것은 협박이다. 관계의 회복을 요구하는 자신의 등장이 나에게 위협이 됨을 인식하고 있기는 한가보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긴 한국이고 자신은 부모이니 뭘 해도 비난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나는 그 어긋남이 너무 소름 끼쳐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말았다.

이후로 나는 퇴근해 집으로 향할 때마다 그날의 플래시백을 경험한다. 

마지막 계단참에 서서, 여기서 몸을 돌려 현관으로 시선을 주면 그 날처럼 어머니가 또 쪼그려 앉아 있지 않을까, 짓무른 눈을 하고 유령처럼 내 이름을 불러대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치 국물이 묻은 스티로폼 박스는 어머니의 분신이다. 나는 그것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커터와 쓰레기봉투를 찾는다. 상자를 뜯고 내용물을 종류별로 분류한다. 쓰레기 내놓는 날이 아니면 음식물 쓰레기는 냉동실 행이 된다. 가끔은 김치가 담긴 락앤락 사이에 편지봉투가 들어있을 때도 있다. 설마 돈은 아니겠지? 하면서 확인해 본다. 돈이면 찢어버릴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자의식이 그렇게까지 엉망으로 비대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 돈은 아니고 편지다. 내용을 읽을 때도 있고 찢어버릴 때도 있다. 읽으나 버리나 내 삶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20년 전과는 달리 나는 성인이니까. 내가 나를 지켜 주고, 내가 나를 먹인다. 내가 아니면 누구도 나를 해롭게 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이 의식을 치르는 내내 분노에 가득차 있었다. 

손끝이 차게 식고 몸이 부들부들 떨려 한여름에도 아래윗니를 맞부딪혔다.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다. '먹지도 않는 걸 뭘 이렇게 보냈어? 요즘 누가 김치를 이렇게 많이 먹어?' 하면서 구시렁대는 내 모습을 누가 보면 마치 의좋은 모녀간의 일상적인 사랑싸움인 줄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리고 나도 때로 그 착각 속으로 들어간다. 언제나 각성해 있노라면 나트륨만큼이나 심장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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